흔해빠진독서

편혜영, 『저녁의 구애』, 문학과지성사, 2011.

시월의숲 2013. 1. 14. 21:17

 

 

<아오이 가든>을 떠올리며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읽은 <재와 빨강>은 비교적 최근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분위기 혹은 장면, 그러니까 시체가 즐비하고 고양이가 득실대며, 지독한 시취와 피가 흥건한 영화를 볼때면 느껴지던 기분이 떠오르게 하는 것은 확실히 <아오이 가든> 쪽이었다. 그래서 <저녁의 구애>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재와 빨강>은 <아오이 가든>의 편혜영을 생각하며 읽었기에 조금 김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번에 읽은 <저녁의 구애>에서는 토막난 살점이나 붉은 피, 고양이, 시취 같은 것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고도 묘한 불편함이 소설집 전편에 흘러 넘쳤고, 그것 때문에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불편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 뒷편에 실린 평론가 김형중의 지적처럼, 그것은 '동일성의 지옥'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끼의 묘'에 나오는 버려진 토끼를 주워다 기르는 주인공이 다시 토끼를 버리듯이, '통조림 공장' 속 공장장과 박의 일상이 결국은 이어지듯 반복되듯이, '동일한 점심'의 주인공이 지하철에서의 자살사건을 목격하고도 아무렇지 않은듯 일상으로 돌아가 계속 복사기를 돌리듯이 말이다. 자연을 떠난 문명 사회에서의 일상이 동일성의 반복이란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편안하게 마비되어 가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주 길을 잃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시를 받아 파견근무를 나가고,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들을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하고 있는 경우를 보며, 그럼으로써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항변을 할 생각도 하지만 이내 그것이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안함과 반복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편안함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종래에는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소외되게) 만든다. 그것은 소설 속에 실종이나 길 잃음 등의 모티브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운명이란 거창한 말을 쓸 것도 없이, 그들의 결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끝은? 그들의 일상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기에, 결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편혜영이 그려낸 세상에서 그건 어쩌면 알 필요도 없는 자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파견 근무를 나가있는 동안에만 토끼를 기르다 결국 버리는 것처럼('토끼의 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버지가 물려 준 복사실에서 복사 버튼을 누르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버려지는 줄도 모르게 버려지고, 눈 앞에서 자살사건이 일어나도 무심하게 복사실 문을 열어 복사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건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견고한 성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섬뜩하게 느껴진다. 편혜영의 이번 소설집에서 어떤 희망이나 낙관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굳이 그것을 발견해야할 이유는 없지만). 그녀는 인간의 지옥을 무덤덤하게 그려놓고, 너희들이 어찌 할 수 있겠어? 라며 되묻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관광버스 타실래요?'에서 주인공들이 목적지도 알 수 없고,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관광버스표를 받은 후 지나가는 관광버스에 몸을 실은 것은 내게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녁의 구애' 속 주인공이 사고난 차의 불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애정이 식어버린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한 것 또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는 편혜영식의 구원이라면 구원이 아닐까? 어떤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저녁의 구애', 62쪽)' 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