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시월의숲 2014. 5. 9. 23:18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제목은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몰아치듯 읽지 않고, 하루에 몇 편 씩, 눈으로 혹은 소리내어 서너 번 읽었다. 정신이 산란하여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소리내어 읽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시집 한 권을 읽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시집은 소설과 달라서 한 번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므로(물론 소설에도 예외는 있다) 시간을 들여 읽어야 했다.

 

소설가 한강은 익숙했지만, 시인 한강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등단한 것이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고 하니, 그리 낯설게만 볼 일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 대해 말할 때 흔히 '시심(詩心) 어린 문체'라고 말을 하는데, 이번 시집을 읽고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한강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치 이 시집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예민함과 극단성, 광기, 고통, 슬픔 등이 이 시집에 다 들어 있었다. 소설보다 더욱 정제되고, 응축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랄까.

 

거칠게 말해서, 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저녁'과 '새벽'이다. 시집 곳곳에 저녁과 새벽이란 단어가 쓰이고, 그것들의 이미지가 시집 전편에 넘쳐 흐른다. 저녁은 낮에서 밤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며, 새벽은 밤에서 아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이 두 시기는 묘하게 닮아 있다. 해질녘과 여명은 둘 다 피 흘리고 부서지는 이미지로 나타나고, 그래서 섬약하고 예민한 인간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영혼 혹은 말의 본질, 근원, 시원을 대면하고자 하는 자의 불가피하고도 투명한 고통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과 기꺼이 대면하고자 한다. 그는 시인이므로, 시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므로. 아무도 앓지 않는 언어라는 병을 기꺼이 앓고자 하는 자가 시인이므로.

 

한강은 그렇게 피를 흘리고, 몸의 어느 한 곳이 부서지고, 혀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감수한다. 오염된 언어 속에서 진실된 언어, 본질적인 언어를 바로 그 '언어'로 다시 표현해내기 위해서. 내게 있어 그것은 거대한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늘 아프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아픈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모두 저녁에 태어나 새벽에 죽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픔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또다시 회복하고, 회복하지만 이내 다시 아플 수밖에 없다.

 

어둠은 빛이 있어야 존재하고, 빛 또한 어둠이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저녁은 빛이 어둠으로 물드는 시간이고, 새벽은 어둠이 빛으로 물드는 시간이다. 어둠 속에만 있으면, 빛 속에만 있으면 우리는 명쾌하고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저녁과 새벽 속에 있다면, 우리는 지워지고, 스며들게 된다. 그렇게 지워지고 스며들고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다시 진정한 빛과 어둠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그렇게 지워지고, 스며들어 끝내 사라져버린 어떤 정신적인 몸부림의 흔적이다. 저녁의 노래이자 새벽의 노래이다. 시집을 다 읽고, 맨 처음 시인의 말을 다시 읽는다.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응시하는 적막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