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이승우, 『지상의 노래』, 민음사, 2012.

시월의숲 2014. 6. 9. 00:20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벽서(壁書)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벽서에 의지가 있다면 결코 그렇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그 벽서의 운명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 수도원의 벽서가 세상에 알려질, 우연하지 않은 다른 경로를 상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든 우연한 경로일 수밖에 없다. 어떤 우연한 경로도 다른 경로보다 더 우연하거나 덜 우연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그 벽서가 어떤 경로로든 알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9쪽)

 

소설의 첫 문단이다. 좀 긴듯 하지만, 이 소설의 분위기와 매력이 이 첫 문단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아 인용했다. '켈스의 책'이라 불리는 장식적인 서체로 필사된 라틴어 성경 원고에 비견되는 천산 벽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천산 벽서에 얽힌 인간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천산의 벽서가 주요 매개로 작용하면서 강상호, 후, 장, 차동연, 한정효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된다. 그들은 모두 어떤 죄의식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강상호는 형 강영호의 죽음을 방치한 것에 대한 죄의식, 후는 연희 누나와의 관계에 관한 죄의식, 장은 천산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 차동연은 수도사들의 죽음에 관한 죄의식, 한정효는 아내를 방치하고 불의한 일에 가담한 것에 대한 죄의식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죄의식으로 인해,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행한다. 천산의 벽서는 여러 인간들의 욕망이 분출되어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종착지였다. 그것은 결국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도 아니고, 부조리한 역사도 아니고, 예술적인 욕망도 아닌 소망과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결말도 나쁘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예술적인 욕망에 대해서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의 방향과 색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나는 어쩐지 젊은 교회사 강사인 차동연이 처음 천산 벽서가 발견되었을때 제기했던 의문, 인간의 믿음과 예술적인 욕망에 관한 가설이 더 와닿았다. 이건 물론 작가의 주된 관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에서도 감지되듯이 인간의 믿음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은 좁게는 천산의 벽서, 즉 성경을 의미하겠지만, 넓게는 벽서를 둘러싼 인간들의 얽히고 섥힌 욕망을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인간의 노래이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래이다. 또한 지상이 아닌 곳,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곳을 알지 못하고,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그러한 곳이 존재하고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설의 초점은 그들에게 맞추어져 있다.

 

<지상의 노래>는 소망과 믿음에 관한 소설이지만, 그것을 강요하거나 설교하려들지는 않는다(물론 한정효의 아내를 통해서 절대자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작가는 그것을 최대한 보편적인 차원에서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나또한 지상에서 노래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후가 한정효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의 작위적인 설정과, 첫 문단의 상상력과 가능성에 비해 읽을수록(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매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진지하고 무게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주제와 형식, 재미가 잘 결합된 흥미로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