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시월의숲 2018. 4. 21. 16:16

저번주 내내 머리에 무거운 돌을 이고 있는 것 같고, 거대한 먹구름이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해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재차 물어야 했고, 서류 속 활자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을 들여다 봐야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려서 곧 쓰러져버릴 것도 같았다. 몇 달 간 계속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버틴 것도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한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다 느껴졌고,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다 해냈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에 치여 허덕이면서 겨우겨우 헤쳐나가고 있으니 - 이렇게라도 헤쳐나가고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 - 심각한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져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다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하고,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고만고만한 고민과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생긴다. 어제는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하여 퇴근을 하고 바로 집으로 가 자고 싶었으나, 갑자기 모임이 생겨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갔다. 내가 한동안 너무나 말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업무에 대한 이야기 말고),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본지가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본 옛 직장 동료들은 예전과 변함없이 나름의 고민과 그동안 생긴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들은 각자 가진 이야기들을 말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들을 가장 흥분시킨 것(최소한 나를 흥분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실이 팍팍하면 할수록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나는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했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우리들은 마치 여행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그곳에 이미 간 것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떤 이는 중국을, 어떤 이는 홍콩을 어떤 이는 라오스를 말하기도 했다. 연수이긴 했지만 어제 유럽을 다녀온 S의 이야기를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러움에 몸을 떨어야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중국 청도를 가자고 했다가 바로 다음 날 계획이 취소되어버린 일을 상기하면서, 여행이란 그곳에 가기 전에 벌써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팍팍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절감했다. 언젠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어떤가? 우리는 제주도를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서 서로 가자고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자고 했던 그 말만으로도 알 수 없는 힘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의 힘도 얼마간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분간은 그 말만 기억하면서 견뎌야겠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