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

시월의숲 2020. 1. 1. 17:26

'걷는 인간'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몇 년 전 문경새재에 갔을 때였다. 아마도 오월이었던 것 같은데, 주차장은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가득 차서 주차할 틈이 없었고, 문경새재로 올라가는 길에는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의아했고, 모두들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길을 따라 올라가는 모습에는 어딘가 성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걷는 인간'이란 그때 떠오른 말이었다. 순수하게 걸으러 온 사람들, 오로지 걷기 위한 목적으로 온 사람들 틈에서 나또한 걷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걷고 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기 위해 어느 한 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아니, 그때 느꼈던 감정은 대단함보다는 놀라움이었다. 걷는다는 것이 실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때 나는 인간이란 어쩌면 걷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걷기동호회에 참여하여 긴 거리를 걷기도 하고, 시에서 주관하는 걷기 대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점심 식사 후의 가벼운 산책을 하기도 했다. 걷기 동호회나 걷기 대회에서의 보행은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점심 식사 후의 산책이나 주말에 집 근처의 가벼운 산책은 걷기와 사유가 결합된 보다 느슨하고 여유로우며 걷는 행위 외에 여러가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걷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것들이 눈에 잘 띄게 되는 현상 때문일까. 평소 걷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책은 보행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띄어왔는지,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미래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지 탐구한다. 내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걷기가 어떻게 여성(더 정확히는 여성의 인권)과 연관이 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저항의 역사와 맞물리는지를 말하는 대목이었다. 나아가 현대에서는 걷기가 어떻게 예술이 되고, 과거와는 달리 어떻게 특별해 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서술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윌리엄 워즈워스라는 영국의 시인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다 이 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서 그는 보행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보행은 그렇게 자연과 하나되는 경험이기도 하다는 걸 그 시인이 몸소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보행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양한 맥락과 층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도 될 수 있지만, 집단적이고 참여적인 행위도 될 수 있다. 언뜻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들의 속성이 걷는다는 행위 하나에 다 녹아들어 있다는 것은 보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또 하나 느꼈던 것은 우리 문명의 발전이 얼마나 보행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는가 하는 것이다. 보행은 그 거대한 위협으로부터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도 그럴것이 기계 문명과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거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항하여 우리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저 튼튼한 두 다리뿐인 것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홀로 걷기'도 하지만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행진'을 하기도 한다. 보행의 그러한 여러가지 의미들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가장 큰 놀라움이자 새로운 발견이었다.


작가는 책의 제일 앞부분에 실린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신과 육제, 내면의 성찰과 사회의 결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도시와 시골, 개인과 집단. 이 양쪽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립하는 듯한 두 항이 이 책에서는 보행을 통해 하나로 연결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10~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