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시월의숲 2020. 5. 2. 17:44

생각해보면, 지금 코로나로 일상이 마비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나는 코로나 이전과 별반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자가 격리 대상자가 아니라도 나는 웬만해서는 집밖을 잘 나가지 않고, 주말이나 휴일에도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코로나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공식적으로 가야만 하는 회식을 하지 않고, 아주 가끔씩 개인적으로 모여서 한 잔 하던 모임마저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이전과는 다른 점이랄까. 그것은 때로 내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모임을 굳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아쉬운 마음도 없으니 그마저도 내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게 나는 이 코로나 시대에도 별일 없이 산다.


오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볼일을 좀 보러 가려고 했으나, 어제 텔레비전 프로와 인터넷을 늦게까지 보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그냥 자고 말았다. 점심 때쯤 일어나 밥을 대충 해먹고, 일주일 치의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로 바닥 청소를 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겨울 내 사용했던 거실 카페트를 여름용으로 바꾸고, 화초에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책을 읽었다. 며칠 전부터 초여름 날씨라서 제법 올라간 기온에 포근하고 나른했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방안의 온도가 더 올라갔고, 청소를 한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니 덥기까지 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하늘이 조금 흐리기만 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늘 하던 주말의 일과를 마치고 인터넷을 접속해서 뉴스를 읽고, 유투브를 본다. 그런 식으로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막상 여행을 가게 되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곳에 가려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려 한다. 그러니까 처음에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막상 그것을 하게 되면 생각보다 적극적이 되는 것이다(그것은 너무 집에만 있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보상심리 때문일까?).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책 읽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최근에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을 읽었다. 사회적인 비상상황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여행을 가는 것이 꺼려지고, 내 성향으로 봐서도 일단 여행을 떠나는 것을 어려워 하니, 이때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일이 여행기를 읽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라는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지만, 그것을 읽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 그 여행기의 내용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영하의 또다른 여행 산문집을 읽게 되었으니, 기억이란 때론 잃어버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궤변론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영하란 작가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에 그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으나 위트있고 재밌는 소설을 쓰는 작가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 내게는 그리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뭐,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것도 있으니까.


어떤 작가의 소설만 읽고서는 그의 소소한 생각이나 일상적인 사연들을 알 길이 없지만, 이렇게 산문집을 읽으면 작가의 내밀한 생각에 조금 더 다가간 느낌이 든다. 나는 이번 여행산문집을 읽고나서 그가 무척이나 여행을 좋아하며(끊임없이 여행을 한 이유를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급기야는 여행이 곧 인생이고, 인생이 곧 여행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여행과 삶, 그것을 관통하는 사유와 오래된 경험이 어우러진 재밌고 우아한 산문이다. 작가도 책의 어딘가에서 말했듯이, 여행이란 내가 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타인의 시선 속에서도, 그들이 써낸 글 속에도 '진짜 여행'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내 방에서도 타인의 경험을 통해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경험과 느낌, 생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정 내 발로 여행한 경험과 어우러졌을 때 어쩌면 그것을 '진짜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당신은 이미 '저기'를 여행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 '저기'에서 느낀 것들을 지금 '여기'에서 읽는 것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가 '저기'를 여행한다고 해서 당신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도 경계없이 무한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쓴, 내 앞에 있는 자그마한 책 한 권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