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진

시월의숲 2021. 9. 19. 23:42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32쪽, '고양이 물루' 중에서,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2020.)

 

 

*

우연히, 길 모퉁이를 돌다가, 어느 집앞을 지나가다가, 혹은 어느 가게를 들어갔을 때 갑자기 고양이를 만날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들고양이들은 내가 다가가거나,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고개를 홰홰 저으며 민첩한 몸놀림으로 자리를 피하지만, 우연히 만난 몇몇 고양이들, 그러니까 목걸이를 하고 있는 고양이들은 내가 다가가 소리를 내어 보아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미동조차 없다. 그들은 마치 그런 나를 보며, '또 바보 같은 애가 한 명 왔군', '인간들이란 왜 저렇게 우스운 짓거리만 한단 말인가?', '그래, 너는 그래라, 나는 계속 자련다'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의 도도함, 배타성, 자기만의 세계는 가히 독보적이다. 개와는 전혀 다른 습성을 가진 고양이들을 볼 때면, 나는 늘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저 문장들을 떠올렸다.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진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고양이과에 가까운가 아니면 강아지과에 가까운가, 하고. 물론 사람을 딱히 두 부류로 분류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나눠본다면 말이다. 나는 때로 내가 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고양이과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어떨 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갈구하는 강아지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또한 많아서 마냥 사랑을 주기만 하는 강아지와는 달리 나만 바라봐주지 않으면 한없이 비참해지고 불같이 화가 나서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면, 나는 고양이에게서는 높은 자존감과 도도함, 그리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구차해지지 않는 정신을 배우고 싶고, 강아지에게서는 한없이 따뜻한 마음과 친근한 행동을 배우고 싶다. 그래서 마음은 따뜻하고 배려심이 넘치지만, 자존감과 도도함 또한 잃지 않고, 시기와 질투 없이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문 앞에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회색빛 고양이가 생각난다.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하는데, 고양이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잠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주인이 와서 고양이를 깨워 건물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야 나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 고양이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고양이가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만의 확실한 구역에서 누가 뭐라 해도 상관하지 않고, 세상모르게 잘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세상에 자연과 나 딱 둘 뿐인 존재가 된다는 것. 이 글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외롭고 고독하다, 그래서  (0) 2021.09.28
아픔의 기록  (0) 2021.09.25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0) 2021.09.16
나무는 나무의 일을  (0) 2021.09.05
비가 오다, 비가 내리다  (0) 2021.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