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기억할만한 지나침

시월의숲 2021. 11. 17. 23:59

요즘 내 블로그에 <기억할만한지나침>이라는 카테고리를 자주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내가 독서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나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든 문장들을 기록해 놓았다. 한번 읽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워서,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더 보기 위해 기록해 둔 것이다. 지금 읽어보면 그 책에 이런 문장들이 있었어? 하고 놀라기도 하고, 이 문장들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데,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기록해 놓은 글들을 다시 읽는 것은 새로운 발견을 한 듯한 느낌을 준다. 다시 읽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을 다시 읽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다시 읽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쪽)"

 

"게으르게 만들어진 영화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인간을 납작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 한 번 보면 다 알겠는 평면적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타인이란 한 번 보면 대충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390~391쪽)"

 

그리고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104쪽)"

 

그렇게 다시금 책을 읽었던 기억과 책 속의 문장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굵고 투명한 눈망울을 가진 소처럼, 천천히. 다른 말로 '기억할만한 지나침'을 몸소 실행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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