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로지 책을 읽는 행위만이 전부인 것처럼

시월의숲 2023. 1. 1. 22:36

그날 밤 티엔은 편지를 썼다. 받을 사람 없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 것들을 적었다.

 

- 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에서(『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수록)

 

 

*

'우리는 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며,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오래전에 나는 위와 같은 글을 썼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로지 읽는 행위만이 전부인 것처럼, 그런.

 

그리하여 위 문장들을 아래와 같이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책을 읽었다. 작은 방안에 혼자였지만 책의 내용이 아닌 책을 읽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손에 든 책을 읽었다."

 

 

*

2023년 새해 바람이 있다면 '오로지 책을 읽는 행위만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책을 읽었으면 좋겠노라고. 책의 내용은 어차피 망각이라는 저 거대한 파도에 언젠가는 잠식되어 버릴 것이기에.

 

그리고 끝내 그것에 대해 쓸 수 있기를.

 

짧은 순간 내게 머물렀던 어떤 감정들이 영영 사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