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에 저 장면이 표지 사진으로 사용된 소설을 읽었다. 그 책 속의 사진은 붉은기가 도는 갈색빛으로, 마치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하지만 컬러로 된 저 사진만 보고도 나는 곧 그 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은 『대심문관의 비망록』이고, 저자는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이며, 역자는 배수아다. 나는 그 책을 읽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아님 책 표지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배수아가 번역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그 책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우연히 저 사진을 보았을 때 ― 사진이 아니라 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 속 한 장면이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으므로 내게는 그저 사진일 뿐인 저 장면을 보고 ―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 하나를 떠올린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그 영화를 본듯한, 그리하여 영화의 내용을 다 알고, 저 장면이 품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느낌을, 그 함의를 다 아는 듯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내게 왜 그리 잊히지 않는 감흥을 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저 장면이 표지 사진으로 실린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더구나 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단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그러므로 이 글은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속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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