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78

기억의 행성

기억이라는 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대리석 같고 절벽 같은 견고함을 아시는지요 기억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욕당한다 했던가요 기억은 물이 되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우리가 양육해온 모든 별들은 결국 부수어지고 말겠지요 기억은 지구를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이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빙산이 녹아 해마다 기억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기억이 뛰어오르거나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에는 얼음이 덮이지요 수증기가 끊임없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도 지구의 기억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다나 육지에서 증발한 기억은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어 내리고 또 구름이 되..

질투는나의힘 2013.02.16

천장을 바라보는 자는

내가 바라보았던 천장의 무늬와 색깔과 온도를 모두 다 떠올릴 수 있을까천장을 보며 보냈던 시간들은 우물을 들여다보며 보냈던 시간과 같아내가 보았던 것은 하늘의 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열리지 않는다 천장은門이 아니므로늘 닫혀 있다뚫고 나갈 수 없다,열고 나갈 수 없다천장은 열리지 않는 뚜껑이므로천장과 바닥 사이에 門이 있다門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다내가 알고 있는 천장에 대해서라면 아직 빛깔과 밝기와 표정들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겠다천장을 보며 보냈던 시간들은 우물이 말라가는 시간과 같아내가 보았던 것은 우물에 핀 이끼가 저희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었다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미세한 풍경의 일지였다고 말할 수밖에 - 조용미,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사, 2011.

질투는나의힘 2013.01.31

청춘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는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 진은영, 「청춘1」 전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질투는나의힘 2012.08.23

달이 뜨고 진다고

달이 뜨고 진다고 너는 말했다.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질 것이다. 네게서 뜬 달이 차고 맑은 호수로 져서 은빛 지느러미의 물고기가 될 것이다. 수면에 어른거리는 달 지느러미들 일제히 물을 차고 올라 잘게 부서질 것이다. 이 지느러미의 분수가 공중에서 반짝일 때 지구 반대쪽에서 손을 놓고 떠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오고 있을 것이다. 심해어들을 몰고 밤새 내게 오고 있을 것이다. - 이수정, 「달이 뜨고 진다고」 전문 *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이제서야 다 읽었다. 내가 평소에 읽는 속도로 봐서 비교적 빨리 읽었다고 해야할까?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짧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읽기에 그리 부담이 없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산문집이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평론가의 책을 이토록 재밌게 읽은..

질투는나의힘 2012.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