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78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 허수경, 전문(『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 2001.)

질투는나의힘 2022.07.22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질투는나의힘 2022.07.05

교행(交行)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 류인서, '교행(交行)' 전문(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수록) * 이 시를 읽고 있으니, 밤기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아마도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질이 나쁜 외투를 입고 목의 옷깃을 잔뜩 끌어올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드문드..

질투는나의힘 2022.01.07

칼과 칸나꽃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 최정례,..

질투는나의힘 2021.12.15

기억의 소수자들

불을 끄고 화장실을 나와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다 새 책을 꺼내 읽으려고 펼치는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던져둔 메모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유령이 사는 걸까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된다 나는 천천히 인정해야 했다 망각이 사는 걸까 망각은 쓰레기처럼 제외될 뿐이지만 쌓이고 쌓인 기억의 지하실이다 날아온 화살도 없는데 불쑥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부르지도 않는데 노을을 따라나선 것도 바람이 불었을 뿐인데 다리가 풀려버린 것도 그대도 잊고 그리움만 남듯이 망각은 쌓여 늪이 되어 더는 비워버릴 수 없다 권위는 역전된다 잊혀진 의미들 기억의 소수자들 기억의 권위에서 버려진 것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 백무산,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

질투는나의힘 2020.03.19

유리창

유리창 그 말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다. 차라리 깨져버렸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창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그 말을 덮어버렸을 텐데, 아직도 들린다. 유리창을 흔들고 있다. 바람 소리는 아니다. 바람 소리였다면 바람 소리대로 그 말을 옮겼을 것이다. 바람의 말. 바람의 문장. 이런 소리는 내 귀가 알 바 아니다. 알아서 차단하는 소리는 알아서 차단되는 말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분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는 지금도 들을 수 있지만 지금도 유리창에 와 부딪치는 말과는 소리부터 다르다. 나는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 다른 말이 들리고 있다. 다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귀가 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귀가 유리창을 향해 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그것은 말이다. 내게 도착한 말이다. 도착..

질투는나의힘 2019.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