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78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울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허수경, 전문, (『내 영혼..

질투는나의힘 2018.10.24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 한강, 전문, (『서랍에 ..

질투는나의힘 2014.05.15

한강 - 효에게. 2002. 겨울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반짝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

질투는나의힘 201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