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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도착했을 때, 오직 들리는 것은 부는 바람과 저수지 위에 무리지어 있던 오리떼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주위를 에워싼 산을 지나 저수지를 훑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에게 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한 고요였을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이육사 문학관을 향해서 걸었다. 뒤에서 오리떼의 울음소리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들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매표소 직원에게 그만 '이곳은 정말 조용한 곳이로군요!' 라는 말을 무심결에 하고 말았다. 직원은 웃으며 '이곳은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니까요.' 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말인가? 그가 이렇듯 고요한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고요함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격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일까? 나는 아리송한 의문을 가진채 문학관에 들어갔다.
문학관 안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압축한 십 여분 가량의 영상을 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몇 편의 시로만 알고 있던 이육사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본 기분이 들었다. 영상을 본 후 문학관을 둘러보았는데, 이육사가 친필로 적은 편지에 눈길이 갔다. 그의 얼굴과 시는 여러번 보았지만, 그가 직접 적은 글씨는 처음 보았다. 세로로 적혀 있는 그의 글씨는 그의 시만큼이나 단단하고 곧았다. 나는 그가 그 편지들을 썼을 순간을 상상했다.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고, 무언가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미로같이 독특하게 설계된 건물을 나오니 정말 가을이었다. 아니, 들어가기 전보다 가을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 속에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거대한 고요가 다시 한 번 내 몸을 감쌌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주위를 둘러싼 산을 지나 저수지를 훑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에게 와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언덕에 서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그 바람을, 그 고요를 해독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고요 속에 오롯이 내 몸을 맡기는 것 뿐, 그래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뿐이란 걸. 문득 매표소 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은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니까요.'
때론 어떤 장소가 그 사람을 기억나게 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을 장소,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릴 장소,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목놓아 부르게 할 그 장소, 광야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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