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39

당연하고도 힘차게, 쓸쓸한 자는

이 책은 제발트가 인상 깊게(본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읽거나 본 여섯 명의 작가들(소설가이거나 화가)에 대한 글이다. 요한 페터 헤벨,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프리드리히 뫼리케,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얀 페터 트리프가 그들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보거나 읽었던 책의 저자라고 한다면 고작 장-자크 루소와 로베르트 발저뿐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보다도 그 둘에 관해서 쓴 글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는 나 역시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여서 제발트가 그에 대한 애정을 품어왔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운명의 이상형을 만난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다. 이로 인해 나는 제발트뿐만 아니라 발저 역시 더욱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배수아는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

흔해빠진독서 2024.04.07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

흔해빠진독서 2024.03.18

역사가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군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누군가의 서평을 읽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다. 그저 재미 교포 2세가 쓴 일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그러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예고편을 보았고,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터뷰와 드라마의 원작 소설가인 이민진의 여러 인터뷰까지 보게 되었다. 예고편으로 본 드라마의 영상미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이민진이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려 '가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

흔해빠진독서 2024.03.02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 엘제 라스커 쉴러, 중에서(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수록) *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열정에 도취해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시집을 나는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집이 가진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매번 놀라움과 신기함을 안겨주었으나 때로 감당하기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낀 그 벅찬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옮긴이의 말을 옮겨본다...

흔해빠진독서 2024.01.01

'진짜' 삶을 위하여(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 맨 첫 장에 실려 있는 저 문장을 읽고 예감했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흔해빠진독서 2023.12.31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중에서 * 가끔(아니 대부분)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으며, 책의 무엇이 나를 이끈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살펴보다가 놀라기도 한다. 내가 언제 이런 책을 구입했지? 하면서. 그것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때론 새롭고 낯선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마치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 속 문장들처럼, 나는 그것을 읽고, 그것을 잊으며, 다시 읽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시인이 쓴 이..

흔해빠진독서 2023.11.27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라면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111쪽,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얼마만의 하루키인가. 그는 그가 꾸준히 했던 마라톤만큼이나 책을 내고, 그 책들은 꾸준히 하루키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그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여전하다'는 평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찬사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그래, 하루키는 하루키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

흔해빠진독서 2023.11.19

이토록 평범함 미래라니

똑같은 투덜거림을 하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나는 또 매번 하던 투덜거림으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기도 전에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과, '할 것 같다'라는 모호한 말을 쓰는 것조차 너무나도 싫지만. 싫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라는 것도 있는 거겠지 세상엔. 어쨌거나 김연수의 비교적 최근작인 『이토록 평범함 미래』를 읽었다. 사실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늘 그랬듯 지금의 나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느낌만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란, 그의 소설이 으레 그러하듯 절망적이지만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종류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이번 소설집은 이전보다 화려하고 재기 발랄하지는 않지만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좀 나..

흔해빠진독서 202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