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39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우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관련한 유튜브를 보았다. 과거 방송작가였다고 밝힌 유튜버는 한강의 오랜 팬이고, 자신의 방송에 한강 작가가 나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책을 소개하며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한 구절이었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17쪽) 그가 읽어주는 저 대목을 들었을 때, 나는 무언가 찌릿한 느낌..

흔해빠진독서 2024.10.20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그 여자에 대하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아는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화자(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는 그 여자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유예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끝은 마치 행성의 폭발처럼 눈부신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다른 결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므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한다. '별의 시간'에 대해서. 이 소설에서 등..

흔해빠진독서 2024.10.20

속삭임 우묵한 정원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는 그것을 쓴다. 바로 자신을 보는 그것이 되어.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글이자, 그 속삭임의 근원일지 모르는 자신의 '우묵한 정원'에 대한 글이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힐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편지.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결국 나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글. 나는 이 소설이 마치 이 소설 바로 전에 나왔던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소설 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별들과 순간들 중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작별..

흔해빠진독서 2024.09.25

사악한 목소리

베일처럼 덧씌워진 타자의 정체성, 끝없이 현재를 침습하는 과거, 기억의 유령. 반듯한 정상이라 이름한 양태는 너울처럼 덮쳐오는 불안한 이질성에 일그러지고 휘어져 섬뜩하게 낯선 이면을 드러낸다. 인식의 낙차에서 탄생하는 새롭고 섬뜩하고 무서운 것들은 위험하고 또 매혹적이다. -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중 옮긴이 김선형의 해설 중에서  *생소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이번에 읽은 버넌 리라는 작가의 작품도 그랬다. 제목 또한 '사악한 목소리'가 아닌가. 유혈이 낭자한 호러 소설은 아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 길고도 긴 여름의 뜨거운 습도를 견디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므로. 세 편의 소설 모두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는 과거에 집안..

흔해빠진독서 2024.09.08

쓸 수 없음에 대해 쓰기

매혹이란 무엇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을 상실하고, 마음의 근육이 녹아내리고, 액체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가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김선오, 『미지를 위한 루바토』 중에서)  *내가 김선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카우프만'이라고 하는 잡지(?) 혹은 쇼핑몰(?)(사이트의 정체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였다.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였는데, 그전까지도 나는 김선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랬으므로 당연히 그가 시인인지도 알지 못했으며,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다면 짧은 인터뷰에서 그의 생각과 언어가 너무도..

흔해빠진독서 2024.08.10

낮의 빛은 그 꿈들을 쫓아낼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해 볼까. (사실 이건 처음은 아니다) 소설 속 작가 자신이 했던 말들로 내 글을 시작하는 것. 그것으로 내 감상을 대신 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동시에 낯선 삶의 광경은, 내가 기억하기로, 『레티파크』 속 이야기들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이 말이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는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때로 어떤 예감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 등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몸을 돌리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꾼 어떤 꿈들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닌다...

흔해빠진독서 2024.07.17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정말이지 나는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웠던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오래전에 저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그 문장이 내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로, 당연한 문제로 내게 새겨졌다. 나의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을 사는 일, 그러니까 진정한 '나'로 사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시 어렸던 나는 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로 살아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아니, 온몸으로 직감했다. 저 문장은 내 생의 화두가 될 것임을. 내 온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 될 것임을.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

흔해빠진독서 2024.05.26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90년대가 내 '현재'라는 이상한 시간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2024년을 살고 있지만, 90년대로 봤을 때는 미래이므로, 나는 지금 2024년이라는 미래를 살고 있다는 감각. 당시 어렸던 나는 90년대 이후의 내 삶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현재는 90년대에 뿌리 박힌 채 그 이후의 삶은 그저 이후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삶에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세상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맞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과거의 나는 어느 한순간 ..

흔해빠진독서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