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39

삶이 거대한 농담이라면

얼마 전 밀란 쿤데라의 타계 소식에 다시 그의 책을 펼쳐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이라고는 저 유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다였으니.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과연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뭐 어쨌건. 변명을 하자면, 나는 너무 일찍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이른 나이에(그의 책을 도무지 소화하기 어려운 나이에) 나는 그의 책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글쎄... 다시 『농담』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읽은 그의 소설은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보다는 잘 읽혔다. 그만큼 내가 컸다는 뜻(여러 가지 의미로)일 수도 있고, 책이 재밌었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각 장은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고, 내용..

흔해빠진독서 2023.08.27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95쪽,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중에서) * 내가 정지돈을 읽게 된 것은 배수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배수아가 번역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때문에. 그의 첫 소설집 『내가 싸우듯..

흔해빠진독서 2023.07.30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이름을 버지니아 울프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니,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내게, 울프의 소설 『올랜도』의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는 비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이 소설은 역자가 말한 것처럼 '남편과 사별하고 자기만의 평온을 찾아 나선 여든여덟 살 노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레이디 슬레인은 총독 부인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모든 열정이 다하고 난 뒤에 찾아온 그것을 어떻게 해..

흔해빠진독서 2023.07.02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인 '인생'과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인 '시'에 대하여(신형철, 『인생의 역사』)

'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다. ···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중에서 * '그'는 결코 쉽지 않은 말을 생각보다 쉽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의 문장을 통하면 꽤 어렵게 느껴지던 '시'도 생각보다 쉽게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무척 자상하고 사려 깊은 선생님 같은데, 마치 오래전 내가 무척 좋아했었던 것만 같은 그런 선생님 말이다. 시를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그의 탁월함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과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혹은 기꺼이 알게 만드는 데 있다. 그는 분명 시인이나 소설가는 아니지만, 언어의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조금은..

흔해빠진독서 2023.06.10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나는 글과 함께 있었다.(8쪽) *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이 책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책은 내 책상의 왼편에 늘 있었고, 나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난 후 책상에 앉을 때면 늘 이 책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 책과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책을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멜랑콜리와 아름다운 순간들을, 그 문장들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정원에 관한 산문이자, 글쓰기 혹은 읽기에 대한 글이다. '베를린 서가..

흔해빠진독서 2023.05.12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없는

'쉼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 있다. 이 말은 당신 자신에게도 적용되므로 당신은 늘 부재중이며, 다른 사람들, 친구들에게도 그렇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으로 보면 당신은 '다른 어딘가'에 있기에 어딘가에는 '부재중'이지만, 또한 어딘가에는 늘 '있기' 때문인데, 요컨대 당신 자신에게 말이다.' '당신은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없다. 그것이 내가 모로코를 두 번째로 여행한 방식이다.'(세스 노터봄, 『유목민 호텔』 중에서) * 쉼 없이 여행하는 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는 늘 부재중이지만 또한 어딘가에는 늘 있는데, 바로 그 자신에게 그렇다. 그러니까 그는 쉼 없이,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도 자신 안에는 늘 있으므로 그는 '타인이 관할하는 세계를 홀로 여행'하는 ..

흔해빠진독서 2023.03.26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최열, 『권진규』, 마로니에북스, 2011.)

권진규가 아로새긴 숱한 인간흉상들은 모두 다르지만 같다. 남성과 여성을 분간할 수 없고, 속인과 승려를 가를 수 없으며, 환희와 비참도 나눌 수 없는 인간이다. 현실을 지워버린 채 꿈으로 가득 채운 그릇일 뿐, 거기엔 눈물도 피도 메마른 듯 그대로 잠들어버린 영혼의 선율만 흐른다. - 최열, 『권진규』 중에서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저 책표지로 쓰인 흉상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저 책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사서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결국 그것을 읽었다. 나는 그의 전시회를 가본 적이 없고,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의 작품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특히 사람 흉상의 테라코타-에 이끌렸다. 그 이끌림에 대해서 당..

흔해빠진독서 2023.01.09

작지만 확실한 위로(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독후감을 쓴 날짜를 들여다본다. 8월 30일.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핑계는 늘 일이다.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집에 오면 책 읽을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잠 자기 바빠서, 피곤해서 등등. 정신없이 바쁘면, 일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열망 또한 커지곤 했는데, 그래서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서 책을 읽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열망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쓴 약을 삼키듯 하나씩 읽어나가는 단편들은, 읽고 난 후 잠깐 동안만 내게 머물다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겨우, 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이 읽히..

흔해빠진독서 2022.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