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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없음에 대해 쓰기

매혹이란 무엇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을 상실하고, 마음의 근육이 녹아내리고, 액체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가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김선오, 『미지를 위한 루바토』 중에서)  *내가 김선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카우프만'이라고 하는 잡지(?) 혹은 쇼핑몰(?)(사이트의 정체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였다.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였는데, 그전까지도 나는 김선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랬으므로 당연히 그가 시인인지도 알지 못했으며,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다면 짧은 인터뷰에서 그의 생각과 언어가 너무도..

흔해빠진독서 2024.08.10

오래된 것들

뜨거운 여름. 문을 지나는데 제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떠니? 눈으로 물었다. 연수를 마치고 오는 길에 고택이 있어 들른 것이다. 그곳의 주인인듯한 제비에게 인사를 하고 고택을 구경했다. 아직 피어있는 능소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천천히 고택을 구경하고 있으니 이 여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모든 것들에 경외심이 들었다. 고택의 기와도, 나무도, 꽃들과 낮은 담들도 모두 뜨거운 태양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인간인 나만이 덥다를 연발하며 그늘만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나는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곳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그늘 또한. 자연과 더불어 고택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되어간다. 나라는 존재 역시도. 다른 점..

토성의고리 2024.08.03

단상들

*휴가라는 것이 가족들하고만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 자명한 사실을 내가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20240716)  * 마시다 남은 커피에 얼음을 넣어 물처럼 마신다. 얼음은 차갑게 만들지만 연하게도 만들어 주는 것. 독해지지 말고 연해지자. 부드럽게 차가워지도록.(20240720)  * 배수아의 신작 소설을 사기 위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본다. 한 권만 사기가 뭣해서 내가 찜해놓은 리스트에 들어가 무슨 책을 더 살까 둘러본다.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책들을 찜(?)해 놓았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내 허영과 치부를 보는 것만 같다. 대체적으로 나는 나를 잘 견디지만, 또 다른 내가 무서울 때가 있다. 이조차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20240721)  *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입속의검은잎 2024.08.02

김선오, 《미지를 위한 루바토》, 아침달, 2022.

시가 어떤 진실에 닿을 수 있다는 말. 그것도 잘 모르겠다. 모든 시가 진실을 향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 사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 쓰기의 즐거움만큼은 진실이므로 시가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닿으려면 역시 즐겁게 쓰는 수밖에 없다. 시 쓰기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한 나의 삶 역시 그렇다면 약간은 진실이라고 할수도 있겠다.(11쪽)  *  내게 명상이란 '살아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살아 있음의 좋음'을 실감하는 일이다. 마치 들리지 않는 음악과 적히지 않은 시가 들리는 음악과 적힌 시의 좋음을 강화하듯이. 몸의 존재가 없다면 몸 이전과 이후로 발생하는 좋음 역시도 없을 것이기에.(26쪽)  *  평소 낮은 텐션과 목소리로 인해 영혼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타인의..

치마를 입은 이상(李箱)

시인 이상이 치마를 입고 찍은 졸업사진을 본 적 있는가. 나는 그 사진을 무척 좋아한다. 단순한 코스튬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그가 택한 전복이 마음에 든다. 사진 속의 진지한 표정도,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성정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한국 문학사상 가장 현대적인 시인이었던 그가 이러한 차림으로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김선오, 중에서)  *그래서 찾아보았다. 맨 앞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시인 이상이다. 정말 그는 꽤 진지한 표정이다. 김선오 시인의 말처럼, 나 역시 이 사진을, 치마를 입은 이상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어느푸른저녁 2024.07.24

낮의 빛은 그 꿈들을 쫓아낼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해 볼까. (사실 이건 처음은 아니다) 소설 속 작가 자신이 했던 말들로 내 글을 시작하는 것. 그것으로 내 감상을 대신 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동시에 낯선 삶의 광경은, 내가 기억하기로, 『레티파크』 속 이야기들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이 말이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는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때로 어떤 예감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 등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몸을 돌리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꾼 어떤 꿈들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닌다...

흔해빠진독서 2024.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