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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모두가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내가 가족들에게 감내한 시간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혹은 모른 척 한 채), 나를 생각한답시고 내뱉는 말들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뿐이고. 이런 시답잖은 말들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 공간밖에 터놓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플 뿐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란… 이래저래 심란한 추석을 보내고 있다.(20240916)  * 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다. 마당에 나가 보고. 교교하다. 만월(滿月) 때 내게 오는 달병病, Mond krankheit. - 전혜린  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가 단지 달병病이었으면!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입속의검은잎 2024.09.29

속삭임 우묵한 정원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는 그것을 쓴다. 바로 자신을 보는 그것이 되어.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글이자, 그 속삭임의 근원일지 모르는 자신의 '우묵한 정원'에 대한 글이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힐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편지.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결국 나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글. 나는 이 소설이 마치 이 소설 바로 전에 나왔던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소설 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별들과 순간들 중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작별..

흔해빠진독서 2024.09.25

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 은행나무, 2024.

나는 집중해서 독서를 할 생각이 없었고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려는 의도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조차 몰랐고 제목이나 저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저절로 나타나는 어떤 글의 파편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을 원했다.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조우한 페이지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소리 혹은 운명으로서, 짧은 순간 동안 지극히 무심히 읽고, 상처도 사랑도 없이, 그대로 지나쳐가기를 원했다는 의미이다. 마치 나이프로 성서를 가르듯이.(7~8쪽)  *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  나는 심지어 교류의 종말을, 특히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교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고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

우중(雨中) 산책

雨中 산책.  발도 아직 덜 낫고, 비도 오고 해서 산책은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버지의 전화와, 요즘 들어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보고자 우산을 쓰고 산책을 다녀왔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가리러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우중 산책은 처음이던가? 산책은 늘 맑거나 어두울 때 했던 기억만 있으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쓰고 걸었던 것 말고 오롯이 산책을 위해 우산을 쓰고 나갔던 기억은 없으니(내 기억은 늘 정확하지 않다). 우중 산책은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침 덥고 습하던 여름의 기운이 한풀 꺾여서 제법 시원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아직 발의 통증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아서 조금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비도 오고 저녁 시간이어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거..

어느푸른저녁 2024.09.21

새벽은 새벽을 기억하고, 낮은 낮을, 밤은 밤을 기억할 뿐

때로 내게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밤이 어제의 밤과 이어져 있고, 오늘의 한낮이 어제의 한낮과 이어져 있다. 나는 아침에서 아침으로, 낮에서 낮으로,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제 각각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새벽은 새벽을 기억하고, 낮은 낮을, 밤은 밤을 기억할 뿐.  그렇게 분산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들)는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침의 나와 한낮의 나, 밤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써, 각각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오로지 어젯밤의 내가 오늘 밤의 나에게 흔적을 남기며, 내일 밤의 나에게 손짓할 수 있다. 계절도 마찬가지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지만,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 내년의 봄이 이어지고, 여름과 여름이, 가을과 가을이, 겨울과 겨울이 이어진..

어느푸른저녁 2024.09.21

정류장에서

오랜만에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 서울은 내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저 먼 곳의 상징적인 도시일 뿐. 언제 서울에 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갔었는지도. 그런 서울에 출장을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의아했다. 그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대도시(마치 외국을 방문하듯)에 가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불안감? 무엇으로 인한? 그래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오랜만에 본 서울은 여전히 모든 것들이 너무 많다. 사람도, 건물도, 소리도, 심지어 공허마저도. 과잉의 도시.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에 왔다. 버스를 기다리며 동서울버스터미널 2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아직도 이곳은 오래된..

어느푸른저녁 2024.09.18

단상들

*나는 잠으로 도피하고 싶은 걸까, 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걸까?(20240901)  * 잠이 너무나 쏟아져 쓰러지듯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 되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린다. 귀뚜라미일까? 구월은 잠과 풀벌레 소리로 시작된다.(20240901)  * 아파트에 귀뚜라미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20240902)  * 저는 늘 적응하느라 애쓸 따름입니다. 늘 적응만 하다가 볼일을 다 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20240902)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당신의 마음이 편할 대로 하세요. 그는 몇 번이고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 편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거절이나 사양..

입속의검은잎 202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