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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 2년 전 오월, 나는 코로나에 걸려 격리중이었구나. 격리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때도 5월 5일이 입하였고 2024년인 올해도 5월 5일이 입하다. 격리도, 오월도, 입하도 이래저래 다 믿기지 않는다.  거리의 이팝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고.(20240502)  * 박상영의 을 막 다 읽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에 혀를 차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던 것은, 슬퍼서라기보다 오늘 유난히 많이 날리던 송홧가루가 때마침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20240502)  * 눈으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고, 향기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다. 전자의 대표로는 벚꽃을, 후자의 대표로는 아카시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밤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달콤한 향기의 급습에 순간 걸음을 멈..

입속의검은잎 2024.05.25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45~46쪽, 중에서)  *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55쪽, 중에서)  *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

제비를 보았다

어제 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제비를 보았다. 한 마리가 아니라 꽤 많은 수의 제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날렵한 선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참새나 비둘기와는 달리 제비의 비행은 허공을 매끈하게 가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제비들이 어디서?  제비들을 보고 있으니 오래전 내가 아이였을 때 할아버지 집 마루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던 제비가 떠올랐다. 마루에는 늘 제비들이 날아다니며 떨어뜨린 흙이나 짚 따위가 떨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연신 마루에 떨어진 흙을 닦으면서도 귀찮은 기색이 없었다. 겁도 없지. 제비는 어째서 가장 위험한 동물인 인간의 집에서 함께 살 생각을 했을까.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은 제비 가족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제비들은 친구 따..

어느푸른저녁 2024.05.18

단상들

* 감기 때문에 멍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멍한 사람이었는지도.(20240418) * 흔히 핑계 대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삶이란 어쩌면 핑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에 핑계를 대고 싶은 걸까.(20240418) * 오늘은 하루종일 빗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의를 입은 채였지만 비는 귀찮게 피부에 계속 와닿았다. 저녁에는 와인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마셨다. 비는 계속 내렸고, 매번 불렀던 대리기사는 갑자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비와 술에 절여지고 구겨진 기분이란 딱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하고 싶다는 뜻이겠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끝끝내 해버리는 아이러니라니.(2024..

입속의검은잎 2024.05.04

김윤아 - 종언

계절이 변하고바람은 먼곳으로 흘러가네요더 남은 말들은흩어져요 바람결에화사하던 꽃들도계절을 따라서 사라지네요다 하지 못했던 사랑이다만 애처러워 울어요스러져가는 마음 나도 어쩔 수 없어그토록 아리던 나를 모두 잊었네사랑했던 나날은 빛바래져가고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새하얀 달빛은새벽에 묻어 숨어버리네요더 남은 얘기는묻어버려요 달빛 속에괴로워 말아요시간이 우리를 달래주겠죠사랑은 모두 다언젠가의 날에 지워져요마음이 있던 자리는 이제 텅 비어더는 흘릴 눈물도 남지않아화사하게 피었던 꽃도 하얀 달빛도달빛 아래에 선 그대의 슬픈 모습도더는 아프지않은 나의 텅 빈 마음도이제 다시는다시는스러져가는 마음 나도 어쩔 수 없어그토록 아리던 나를 모두 잊었네사랑했던 나날은 빛바래져가고두 번 다시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겁..

오후4시의희망 2024.05.04

에곤 쉴레를 좋아하세요?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안부를 묻는 대신 에곤 쉴레의 그림을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에곤 쉴레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프로필 사진 에곤 쉴레 아니에요?"라고 말했고, 그제야 나는 그가 잘 보고 있다는 것이 내 SNS의 프로필 사진이라는 걸 알았다. "맞아요, 에곤 쉴레..."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우리들은 각자의 일 때문에 금방 헤어졌다. 애초에 우연히 만난 것이었기에 더 길게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다시 한번 더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1박 2일 워크숍에서였다. 내가 인사를 하자마자 그는 또 "어떻게 에곤 쉴레를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네요."라고 물었다. 전에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

어느푸른저녁 2024.04.28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90년대가 내 '현재'라는 이상한 시간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2024년을 살고 있지만, 90년대로 봤을 때는 미래이므로, 나는 지금 2024년이라는 미래를 살고 있다는 감각. 당시 어렸던 나는 90년대 이후의 내 삶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현재는 90년대에 뿌리 박힌 채 그 이후의 삶은 그저 이후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삶에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세상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맞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과거의 나는 어느 한순간 ..

흔해빠진독서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