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핸드폰 유감

시월의숲 2005. 3. 20. 14:35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핸드폰이 없던 내가 핸드폰을 구입했다. 남들은 다들 '드디어'라든가 '이제서야'라는 말을 강조하며 원시시대(?)에서 탈출한 것을 축하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동안 핸드폰 없이도 잘 생활해왔고 그닥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관계가 지극히 협소한 나로서는 핸드폰이 있어도 연락올 만한 친구가 몇 안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락이 온다고 해봤자 별 영양가 없는 말들 뿐일테니. 간혹 가다 한 두번 울릴 핸드폰을 받기 위해 비싼 핸드폰을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일 뿐 아니겠는가.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가기도 싫었다.

그런 내가 핸드폰을 구입하다니!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혹시 다음 학기에는 애인이라도 만들어보려 함인가? 아님, 핸드폰에 대한 기존의 내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그런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딱히 핸드폰을 산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 왜, 무엇 때문에?

핸드폰을 구입하고 울리지도 않는 폰(이런 걸 캔디폰이라고 한다는 것을 며칠전에 처음 알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운다나, 어쨌다나...)을 가지고 다니고 있으니 엉뚱하게도 가난과 변화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데도 그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변화 속도가 빠르며 빠를수록 더욱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오직 무참히 무시당하고 짓밟힌 인간들. 언젠가는 그들을 새로운 종이라고 명명해도 될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이젠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것도 모자라 사진도 찍고, 인터넷에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은행결제도 하고, 게임도 한다. 아마 내가 모르는 다른 기능이 더 있을 것이고 그것은 앞으로 더욱 발전에 발전을,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다. 물론 변화는 좋은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런 패배적인 기분에 사로 잡혀 피해망상적인 말만 내뱉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가?

핸드폰 하나 산 거 가지고 별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다. 이런 거 하나만 봐도 난 참으로 소심한가 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큰 핸드폰을 바라본다. 앞으로도 계속 울리지 않을 아니, 아주 가끔,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울릴 내 핸드폰을 생각하니 조금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것도 다 핸드폰의 운명인 것인가. 가난의 운명에 사로 잡혀 헤어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난 운명 따위는 믿지 않지만 내 핸드폰을 보니 왠지 불쌍한 운명의 폰이 될 것 같은 예감을 떨칠 수 없다.

 

 

-2004.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