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깊숙한 곳에 고이 넣어놓았던 일기장을 꺼내본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날이 언제였더라, 날짜를 가늠해보며 지난 내 일기를 훑어 본다. 무엇이 그리 답답하고 서러웠던 것인지 온통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 뿐이다. 쓰레기통에 쳐넣어도 좋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 생각의 배설물들. 하지만 이상하게, 읽는 동안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쑤시는 것처럼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래, 그땐 별것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도 상처받고 아파했었지. 물론 지나간 날들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진 못한다. 다만 시간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했을뿐. 시간의 힘은 정영 위대하다.
요즘들어 일기 쓴적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틀에 한 번, 늦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썼었는데 이젠 그 기간이 한달을 넘어간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일기를 쓰는 일은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일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의미로 일기를 쓴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일기 쓸 일이 없다는 것은 삶에 특별한 일이 없다는 뜻도 될텐데 그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일기를 쓴다는 것과 일기 쓸 일이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일기를 쓰는 일도 어렵고 그렇다고 일기를 쓰지 않는 일도 어렵다. 이런걸 일기 강박증이라고 해야할까.
아직 일기장에 적힌 날들보다 적히지 않은 날들이 더 많음을 생각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날들을 슬퍼하고 기뻐하며 노여워해야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아직 체념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2004.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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