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최영미, <시대의 우울> 중에서

시월의숲 2005. 8. 6. 12:37

" 이 여행이 끝나면 나 또한 저 시끌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지저분한 건 오히려 삶인지도 모른다. 삶은 때론 우리를 속일지라도 생활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거의 없다. 그것은 때맞춰 먹여주고 문지르고 닦아주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일상은 위대하다.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 여행을 계속하려면 가방을 버려선 안 되듯, 삶은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로 나날이 새로 채워져야 한다.

  그 뻐근한 일상의 무게가 없으면 삶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영원히 허공을 떠돌 것이다.(14쪽)"

 

" 기차를 타고 미지의 도시에 다가갈 때의 느낌은 서투른 연애의 매커니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가 어느 한 장소의 혹은 한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머물 때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다가갈 때, 혹은 그것을 떠날 때인지도 모른다.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경험할 것인가, 아니면 환멸을 맛볼 것인가는 어느정도 변덕스런 날씨나 그때그때 당신의 컨디션과 같은 우연의 폭력에 의해 좌우된다.(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