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05. 8. 1. 23:19

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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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가 읽은 것들은 진정 내가 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불안이 읽은 것에 불과했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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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그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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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몰랐고 미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나 혹은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지나간 오류나 다가올 망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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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깊게 관통했던 것은 소유욕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며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름다움, 섬세함, 배려와 관용, 은둔된 평화, 글을 읽고, 음악과 함께 그리고 쓴다…… 그러면서 마침내 찾아낸 영혼의 일치, 그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배반하고 파괴해버릴 만큼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인간은 왜 소유욕을 가지며 그것이 충족되지 못할 때 짐승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그 분노가 수천 가지의 음 중에서 긴 시간 동안의 고뇌 끝에 얻어진 단 하나의 극치의 선율, 그 선율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짓밟고 모욕하며 천박한 표현으로 스스로를 저주하고 미친 닭처럼 제 살을 쥐어뜯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왜 인간은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소유욕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그것은 마음속의 긴 여정의 사색에서 얻은 모든 윤리적인 질문들을 침을 뱉고 조롱하는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그런 것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이루어내는 다른 일들이 과연 가치를 평가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단 말인가.…나는 자신을 위한 한마디의 위안이나 변명의 말도 찾지 못했다. M의 몸짓 하나, M의 그림자 하나, M의 목소리 하나까지도 독점하고 싶은 갈증에 시달릴 때, 사랑은 곧 지옥이 될 것이다. M은 그런 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다. M은, M은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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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치를 느낀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고, 수치를 느끼는 자신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그 날카로운 수치로 인해서, 동시에 내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수치의 늪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절대적으로 무의미했으며 존재하는 것은 단지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무한으로 반사되는 수치심, 그 영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나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을 저질렀고,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수치를 느끼며, 자신이 수치스러워함을 분명히 알게 되고, 자신이 느끼는 그 숨길 수 없는 수치 때문에 더더욱 수치스러우며, 자신이 수치스러워한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우며 마침내는 무감각 속에서, 오직 수치스럽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그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13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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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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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므로 더이상의 사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벽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더이상 나를 자극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고립이다.(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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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쓰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단지 소설의 형태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혹은 처음에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읽고 들은 몇 권의 책과 소소한 음악에 관해서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유로운 글이란 그 형태로나 내용으로나 이미 규정되어 있는 어느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197쪽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