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독학자』중에서

시월의숲 2005. 9. 5. 14:13
 

"그렇게 조용히 남아있는 것들, 삶과 죽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 격정의 폭풍을 경건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들, 나를 키워온 것들, 내가 열에 들떠 찾아 헤매기도 했으며 그것을 찾아 먼 길을 떠나려고 짐을 싸기도 여러 번이었으나 문득 둘러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들, 오직 쓰는 자들과 읽는 자들만을 위해서, 언어의 영웅들, 그들의 언어만으로 존재하는 저 엘리시움(Elysium)의 세상을."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저녁의 광장에 희미한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칠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도 멀리 할 것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 대화하는 것도 피할 것이다. 한국에서 살 수 없는 읽고 싶은 책들은 외국의 출판사에서 직접 주문하고 그렇게 읽은 모든 책들에 대해서 독후감을 쓸 것이다. 그것들은 마흔 살까지 내 사적인 일지를 대신하게 되리라.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영화관에 가거나 바닷가에 놀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결혼이나 사랑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느 순간에 타인들을 상대로 뭔가 아는 척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지더라도 자신을 엄하게 꾸짖을 것이다. 내가 형편없이 미숙하고 내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도 한참 부족한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내 교만을 압도해버리는, 내가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을 찾아서 읽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쓰지 않겠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겠지만 초조해하지도 않으리라. 분명히 고독하고 틀림없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