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중에서

시월의숲 2005. 8. 27. 10:51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 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무리의 불쌍한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 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대부분) 끝난 장소였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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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161~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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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모두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각각 타인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혹성은 사람들의 적막감을 자양분으로 삼아 회전하고 있는 것는 것일까?

  나는 그 평평한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지금도 지구의 궤도를 돌고 있을 수많은 인공위성을 생각했다. 지평선은 아직 어슴푸레한 빛으로 띠를 두르고 있었지만, 포도주 같은 깊은 색으로 물든 하늘에는 몇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인공위성의 빛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육안으로 포착하기에는 아직 하늘이 너무 밝다. 눈에 보이는 별들은 모두 못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한 장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 채로 지구의 인력을 단 하나의 연줄로 삼아 쉬지 않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스푸트니크의 후예들을 생각했다. 고독한 금속 덩어리인 그들은 차단막이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순간적으로 스치면서 영원히 헤어져 버린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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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로 지낸다는 건 비내리는 저녁에 커다란 강 입구에 서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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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치명적으로 버려졌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찬탈당했다 해도, 또는 한 장의 피부만을 남겨 놓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뻗어 정해진 양의 시간을 끌어 모아 그대로 뒤로 보낼 수 있다. 일상적인 반복 작업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솜씨있게.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매우 허전한 기분이 되었다.(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