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시월의숲 2005. 9. 24. 11:29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읽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읽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시집, 《이 시대의 사랑》중에서

 

 

 

처음 이 시를 읽었을때 아주 둔탁한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세상에, '개 같은' 가을이라니!

아름답게 정제되고 착한(!) 언어로 반성하는 시들에 익숙해 있던, 그래서 그런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내 협소한 사고에 아주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듯 도발적이고, 모든 것을 부셔버릴 듯 강렬한 언어로 쓰여진 그녀의 시에 나는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리는 비탄과 자학과 슬픔이 가득한 언어가 내 내부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것은 분명 나를 좀 더 긍정적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강렬한 고백은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생의 모순에 대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국 그녀가 누구보다 생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너무 사랑해서 증오스러운! 아~ 절망과 슬픔의 카타르시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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