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우연한 여행자>를 읽고

시월의숲 2007. 8. 23. 12:20

하루키의 단편들은 예전에 거의 읽어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번에 읽은 <우연한 여행자>는 처음 읽어보는 하루키의 단편이었다. 아니다. 그의 단편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읽었다 하더라고 그것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 어쩌면 과거에 한 번 읽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연하게도 나는 하루키의 단편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재즈나 게이의 신이 있길 바라는 등장인물의 말처럼 나도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신이 있길 바라기 때문일까?

 

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도 내가 경험한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경험이 한 번이면 기억에 남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굉장히 신기했기에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나는 돈가스가 무척 먹고 싶었다.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내 머릿속엔 온통 돈가스의 소스와 고기의 육질, 그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돈가스를 먹지 않겠느냐고 묻지 않겠는가. 그때 얼마나 신기했던지. 물론 이건 사소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연이라고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내가 생각한 것이 그날 저녁 이루어진 일)은 그 형태를 바꾸어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우연. 이 소설은 우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은 대체로 비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는데(말하는 쥐라든지, 혹은 까마귀, 양 사나이, 도서관 지하의 거대동굴, 세계의 끝 같은 것들), 이 소설은 비현실적인(?) 것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었고 그것이 제법 신선했다. 자신은 무라카미이고 <태엽 감는 새>를 쓰고 있으며 지금부터 자신이 경험했던 것(다른 이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몰아붙이는)을 이야기하겠다고 서두에서부터 당당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이 소설이 논픽션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그러한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 즉 소설의 주제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해야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이니까. 독자가 <우연한 여행자>를 읽고 이건 뻥이야, 라고 느끼지 않게 하려면 개연성 있어야 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건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야, 라며 그럴듯한 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난다. 고로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우연’이라는 ‘비일상적’이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현상이, 우리 삶을 좀 더 긍정적이고 풍요로운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 소설에서 우연은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마법처럼.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우연과 필연은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조율사의 말처럼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사실 매우 흔해빠진 현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현상들을 모르고 지나쳐갈 뿐, 도처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우연이면서 곧 필연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모든 사람들이 조율사의 경우처럼 그렇듯 극적인 경험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하찮게 보이는 우연의 일치가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일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잠시 여행 온 ‘우연한 여행자’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