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첫 문단을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휴대폰과 자가용. 주인공의 말처럼 나 역시 의도적인 결핍이 되레 자부심의 원천이 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삼, 사 년 전에는 나도 핸드폰이 없었다. 자가용은 지금도 없지만. 그때만 해도 핸드폰이 전 국민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던 때라서 주위를 둘러보면 나 빼고는 모두들 하나씩 들고 다녔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안 그래도 왕따처럼 혼자 다녔었는데, 핸드폰이 없음으로 해서 더욱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내 주위의 누구에게나 연락할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해 별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들이 나에게 연락하기가 힘들었겠지만, 솔직히 그들은 나에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읽으니 소설이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차를 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페르난도 서커스단과 상관없고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과는 더욱 관계없는 이 소설은 사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에 대한 이야기다. 이 생뚱한 제목은, 소설의 말미에 드가의 그림인 것으로 밝혀지지만 사실 그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들의 고압적인 시선’에 갇힌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한 여인이라고는 했지만, 어찌 한 명의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휘둘려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문명의 이기들을 즐기고 그것이 주는 달콤한 안락함에 빠진 생활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건대, 작가는 그러한 편함과 안락함에 편승하지 못하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마저도 그러한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야만 하는 상황의 잔인함이랄까, 다수의 폭력성 같은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모두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이 되는, 되라고 강요하는, 그래서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상황.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 채.’ 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그래도 반드시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이 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은 여전히 든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기에. 우리가 문명의 이기들에게서 얻는 것 대신 잃는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도로주행을 시켜주는 남자처럼, 우리에게 그리워할 무언가가 많아진다는 사실이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이 많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 우리는 편함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첫눈에 관한 시를 쓰고픈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차를 몰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딱지조차 떼어버리겠지.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프라이드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과연 있기나 할까?
200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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