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최인석,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창작과비평사, 2003.

시월의숲 2008. 1. 3. 20:47

누구나 한번쯤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진정으로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행여 운이 좋아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농담을 듣지 않고 자랐더라도 어느 순간 삶이 나를 배반하듯 비껴갈 때, 인생의 시작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만 불리한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주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또 다른 꿈을 꾸게 만들기도 한다. 비록 그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피라고 해야 하나, 절박한 위안이라고 해야 하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꿈, 그러한 환상에의 열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을 더욱 부정하게 되고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인석의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도 그러한 꿈의 나라, 환상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다. 배경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하지만 배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대놓고 정치색 짙은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고아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우회적으로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 보이고 있다. 시대적 상황은 그러니까 주인공이 원래 있었던 곳에 대한 갈망을 더욱 실감나고 개연성 있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실이 암울하면 암울할수록 더욱 절박하게 그런 생각이 날 것이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현상들을 고발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그 삶을 억압하는 폭압적인 악을 그리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주인공인 심우영은 고등학교 졸업을 일 년 남기고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미군을 상대로 하는 나이트클럽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미군들의 시중도 들고 미제물품을 팔아 돈을 챙기기도 하면서 그 생활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몇 년 후 그가 고아원에서 사랑했던 영순이가 자신이 근무하는 나이트클럽의 스트립 댄서가 되어 들어오게 되고 그녀가 나이트클럽 상무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고아원 후배와 함께 상무를 죽이게 된다.

 

무엇보다 고아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순탄치 못한 그의 삶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 없이 생겨나는 사람은 없지만 고아란 부모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비극이고 모순인 것이다. 그들이 부딪쳐야 하는 세상이란 과연 보통의 사람들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고아는 고아를 낳는다는 말처럼, 가난이 가난을 낳고, 비극이 비극을, 어둠이 어둠을 낳게 되는 악의 순환 고리 속에서 그는 허우적댄다. 작가는 주인공의 치욕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내재한 폭력과 압제, 모순과 더러움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지금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상상은 얼마나 짜릿하며 설레는 일인가. 더구나 지금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열고야란 나라에서 급파된 스파이라는 상상은. 온갖 더러움과 치욕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서글퍼지는 것은 왜인지. 그곳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갈 수 없는 곳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곳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사회를 마냥 악으로 보는 작가의 이분법적 사고가 좀 단순한 듯 보였지만, 주인공인 심우영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작가도 아마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든 그렇지 않든, 세상에는 여전히 폭력과 불합리와 모순이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사회 속에서, 가정 속에서 부디 삶이 치욕이 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아니, 이미 태어나는 순간 삶은 치욕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