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언수, 『캐비닛』, 문학동네, 2007

시월의숲 2008. 3. 17. 19:17

그동안 나름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 책을 읽어도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굳이 독후감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 그 느낌을 어떻게든 쓰지 않으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읽은 책이 무척 인상적이었을 때는 더욱 더. 몇 주 전에 읽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은 김언수의 <캐비닛>을 읽고 난 후의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생각건대 독후감이라는 것도 그것이 쓰여지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도 잊혀짐과 기억하기의 한 종류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요즘은 새롭게 할 일이 생겨서 이전만큼의 여유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책을 꼬박꼬박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예전처럼 진득하니 오래도록 책을 붙들고 있질 못한다. 육체적 피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졌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어쩌면 인터넷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조금씩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책을 한 번 잡으면 폭풍같이 읽어나가라고 장정일은 말했지만, 어쩔 수 있나. 다행히도 김언수의 <캐비닛>은 몇 페이지 읽고나서 한참 있다 읽더라도 크게 무리가 없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론이 길었다. 한마디로 김언수의 장편소설 <캐비닛>은 단편같은 장편이었다. 캐비닛 속의 서류들처럼 서로 연관되고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이 소설이라는 캐비닛 속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바로 13호 캐비닛. 작중 화자의 말처럼 13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지 말자. 그것은 그저 열 세번째에 위치한 캐비닛이라는 의미외에는 없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13호 캐비닛에는 어떤 내용의 서류가 들어있는가? 그것에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그 캐비닛에는 심토머라고 하는 남들과는 좀 다른 징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하며, 입 속에 도마뱀을 기르거나, 자신의 도플갱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면 딱 맞을 기상천외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 캐비닛에 기록되고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주인공인 공대리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그 캐비닛을 우연히 열어 보았다가 엉겹결에 그 캐비닛의 보관자이자 기록자가 된다. 그러한 심토머들을 연구하는 권박사는 그들을 퇴화가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며 공대리에게 그들에 관한 기록을 잘 보관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대충의 줄거리는 그러한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엽적인 줄거리가 아니라 심토머들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시선이다. 심토머가 된 사람들은 누구보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앞만 보며 내달리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드러내보이는 동시에 그러한 삶이 결코 가지지 못한 소중한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기능을 한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심토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약자에 대한, 혹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함이 넘실거린다. 무엇보다 나는 그점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심토머가 된 사람들이 대체로 자신들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보통 사람일 때보다 더욱 삶을 긍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남들과는 다른 어떤 '징후'를 가진 사람으로 변함으로써 내적으로 어떤 심리적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과 다름에서 오는 단절과 고립, 이해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통, 절망 같은 것들을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의문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심토머들이 자신들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보다 나은 삶,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 작가의 시선만은 충분히 아름답고 따스했다.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말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부디 그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가 되기를 바라본다. 벌써부터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