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차가운 피부』, 들녁, 2007

시월의숲 2008. 3. 29. 20:10

스페인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을 읽는내내 내 머릿속은 무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하나의 계단을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계단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랄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은 이 소설은, 처음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이야기인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소설은 문명과 떨어져 자발적(?)으로 고립된 한 인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에다가  <파리대왕>같은 모험담이 점철된, 한술 더 떠서 B급 괴수영화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두꺼비 얼굴의 괴물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신의 혁명군으로서 독립을 이룬 아일랜드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고 홀로 있을 곳을 찾아 남극의 무인도에 찾아든 한 남자이다. 등대 하나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좁은 무인도에 그는 기상관이란 임무를 맡고 생활하게 된다. 그곳에 있던 전임 기상관은 어디로 갔는지 행적이 묘연하고, 등대를 지키는 사람 또한 알 수 없는 침묵과 추레한 몰골로 무장하고 있다. 그날 밤 그는 사택에서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차가운 피부를 가진 괴물들로부터 습격을 받게 된다. 그들은 왜 습격을 하는 것일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하고보니 소설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미스테리물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런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게 다였다면, 이 소설은 아마도 괴물이 등장하는 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거기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성찰을 시도한다. 인간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 절망한 한 인간을 무인도에 데려다 놓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소설에 담긴 메시지나 이야기가 어느 한 방향으로 흘러가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소설을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읽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좀 더 혼란스러웠던 것이고, 그래서 좀 더 다양하고 폭넓게 소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게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 모든 것, 앞서 말했던 정치적인 맥락과 고립되고 단절된 인간들의 소통가능성, 사랑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 인간이 가진 오만, 끝간데 없는 폭력성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차가운 피부'를 가진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아닌가 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장편소설로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이랄까. 때론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들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최소한 '그들'의 눈에는 별거 아닌 것에 총을 갈겨대는 '우리'가 바로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해야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