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첼로

시월의숲 2008. 3. 30. 12:44

얼마전에 클래식 음반을 몇 개 구입했다. 재크린? 재클린? 재클린느? 그냥 재클린으로 해야겠다. 재클린 뒤 프레의 베스트 앨범과 미샤 마이스키의 베스트 앨범,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그리고 정경화의 사계.

 

비발디의 사계는 워낙 유명한 클래식 넘버라서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이 좀 더 작용한 것 같다. 어쨌든 정경화의 유려한 바이올린 연주로 듣는 사계는 정말 멋졌다. 두 개의 시디가 들어있는데, 하나는 연주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음악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웠다.

 

그러나 첼로! 그 음색은 정말 멋지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었을 때의 그 황홀함이라니. 하지만 그 음반을 사지는 않았다. 그건 좀 더 시간을 두고 누구의 연주가 좋을까 숙고해서 사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워낙 유명하고 탁월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음반이 많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다. 어쨌거나 재클린 뒤 프레와 미샤 마이스키,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는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이 나에게 각기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요즘은 같은 첼로 연주라도 연주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무척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우아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재클린 뒤 프레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답게 힘이 있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비장미랄까, 조금은 슬픈 느낌이 있었다. 때론 힘이 넘쳐서 거칠게 느껴질 정도의 첼로 연주를 듣고 있을 때면 내면에 아무도 모를 단단한 응어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내 이런 생각은 아마도 그녀의 열정적인 엘가 협주곡을 듣고 나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고,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내 머릿속에 인상깊게 박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미샤 마이스키는 정치적 상황에 휘둘려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닌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장중하다기 보다는 자유로움과 가벼움, 우아함 등이 느껴졌다.

 

이는 물론 기존에 있는 그들의 평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와는 별도로 내가 직접 음악을 듣고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이 내겐 무척이나 흥분되는 일이다. 내가 그들의 음악을 몇가지 형용사로 표현하긴 했지만 어찌 한 음악가의 스타일을 고작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음악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분위기와 느낌으로 다가오듯, 한 연주자의 연주라도 어떤 음악가의 어떤 음악을 연주하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것이 아닐까. 물론 나름의 연주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첼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연주자의 이야기로 새어 버렸다.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는 첼로연주라지만 첼로라는 악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우아함, 부드러움, 웅장함, 슬픔은 연주자를 불문하고 첼로라는 악기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아, 그 아름다운,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저음! 그 음이 음표에 따라 높게도 낮게도 연주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로 내 귓가에, 내 가슴 속에 파고든다. 둥글고도 유려한 곡선을 연상시키는 선율의 이어짐. 아, 나도 첼로를 연주할 수만 있다면! 악기 다루는데 소질이 없는 나는 그냥 듣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나는 늘 안타깝지만, 그래서 늘 첼로 연주를 들을때마다 더욱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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