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산책

시월의숲 2008. 10. 12. 18:39

오후 세시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삼 주 만에 보는 예천은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어제 삼거리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수많은 플래카드들이 오늘도 그 자리에 걸려있었다. 그것들은 다리를 거의 둘러싸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에 걸려 있는가 하면, 커다란 풍선에 메달려 공중에 띄워져 있기도 했다. 시월은 원래 행사가 많은 달이긴 하지만 도청이전으로 인해 더더욱 많은 행사들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로인해 더욱 많은 플래카드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일테고. 그것들은 사뭇 위협적인 모습으로 온사방에 걸려 있었는데,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약간은 들떠 보이기도 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시원한 바람이 아니었다면 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끈질긴 햇살이었다. 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한천을 따라 걷다가 돌다리를 건너고, 산책로를 걷다가 다시 돌다리를 건넜다. 한천둔치에는 족구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하얗고 바람은 시원한 날이었다.

 

친구들이 보고싶어서 전화를 했지만 다들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좋은 날은 혼자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이 맞는 친구와 차 한 잔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세면기에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철사로 머리카락을 끄집어 냈다. 시커멓게 딸려 올라오는 머리카락들. 내친김에 화장실 청소도 했다. 세면기와 변기를 씻고 타일벽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찌든 때까지 말끔히 없애진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깨끗해진 화장실을 보고 있자니 나 자신도 조금 깨끗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일이면 또 울진으로 가야한다. 예천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울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몸담았던 곳에서 잠시 떨어져 있어보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한번쯤 필요한 일이 아닐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멀어지기 때문에 몸도 멀어지는 것이리라.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에서 멀어진다고 하여 마음마저 멀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것이 어쩌면 추억의 힘, 혹은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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