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남도기행

시월의숲 2008. 10. 18. 12:18

생애 처음으로 전라도 땅을 밟고 왔다.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곳이었는데, 울진에서 출발해서 거의 여섯 시간 가까이 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차에서 본 전라도의 풍경은 경상도와는 사뭇 달랐다. 일단 도로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고 넓은 평지 덕에 시야가 탁 트여서 오랫동안 차를 타고온 피곤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중학교 국사시간에 배웠던 곡창지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여수, 순천, 벌교, 구례라는 표지판의 지명을 스쳐지나갈때면 고등학교 때 읽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어찌보면 내가 지금 상당히 역사적인 장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 설레기까지 했다.

 

순천에 간 진짜 목적은 그곳에서 개최되는 전국평생학습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날짜를 잘못 안 결과로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날은 그보다 이틀이나 뒤였다. 그래서 한창 부스를 마련하고 무대를 설치하는 모습만 보고는 전시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많이 아쉬웠지만 이틀이라는 출장기간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갈대축제가 열리는 순천만을 돌아보았는데 습지와 갈대를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에 아쉬운 마음이 좀 사그라들었다.

 

시간도 남고 해서 순천에서 유명한, 아니 전국적으로 유명한 송광사에 갔다. 도착하니 거의 다섯 시 반이 넘은 시간이어서 사위가 약간 어둑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송광사로 걸어들어갔다. 절은, 그것이 유명하든 않든 간에 산 속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속세의 떨쳐내지 못한 미련과 무거운 짐을 조금이니마 내려놓는 기분이 든다. 정신이 정화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굳이 부처를 믿지 않더라도 말이다. 송광사에 올라가면서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당히 정갈하고 차분하며 고요히 명상에 잠긴 듯한 분위기의 절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라 관광객들이 적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절 자체가 품고 있는 고요한 분위기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목탁소리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고.

 

그렇게 송광사를 내래와 순천시내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17일)엔 보성 녹차밭에 들렀다. 쭉쭉 뻗은 삼나무의 곧은 줄기와 붓끝같은 삼나무 잎파리들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본 녹차밭! 가을이라 그 색깔이 그리 푸르지는 않았지만 산 비탈에 쭉 둘러싸여있는 녹차밭 사이를 걷고 있자니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느껴졌다. 녹차밭과 삼나무가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푸름 속에 있으니 나도 푸르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안의 모든 안좋은 기운들, 몹쓸 생각들이 모두 빠져나기를 바랐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제일 싼 머그컵을 하나 샀다. 이제 그 컵을 보면 녹차밭과 삼나무가 생각날 것이다. 그럼 내 마음 조금 푸르러지겠지.

 

집에 오는 길은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또 아쉽기도 했다. 전라도 특유의 구성진 사투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 가 본 전라도. 그 중에서도 순천과 보성. 물론 그곳이 전라도의 전부는 아닐 것이나 그만하면 좋은 기억 하나가 마음 속에 새겨진 것 같아 무척이나 기쁘다. 다음에 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아니, 만들어서라도 갈 수 있게 되기를.

 

생각해보니 남도기행이라는 제목이 참 거창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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