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이레, 2004.

시월의숲 2009. 5. 24. 22:54

어쨌든 '그것'이 행동한다. '그것'이 내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여자를 향해 차를 몰고 가도록 만들고, '그것'이 상관에게 사생결단을 작정한 듯한 말을 하게 하고, 비록 내가 담배를 끊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게 하고,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담배를 피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담배를 끊는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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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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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