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느 몽상가의 죽음

시월의숲 2010. 11. 24. 23:28

어제 오후, 한참 업무에 바빠 정신이 없을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근무 중에는 거의 전화가 오는 편이 아니어서(평소에도 전화가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이 시간에 누가 전화했을까 의아해 하며 핸드폰 폴더를 열었더니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앞뒤 맥락없이 빨리 짐을 싸서 피난을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한에서 쏜 대포로 연평도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있냐고 내게 되물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도발하는 북한의 행태를 자주 봐온지라 이번에도 그저 엄포를 놓는 거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닷가에서 이루어진 교전이 아니라 실제 우리 주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에 대포가 날아와 박혔다고 하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동생에게 업무 때문에 바쁘니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놀란 마음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업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무척 바쁜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가고 있는지 텔레비전을 볼 생각도, 인터넷 뉴스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순간 나를 급습한 어떤 공포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과거 일본의 독도 망언이나 북한과의 서해교전 때에 느꼈던 감정과는 달랐다. 그것이 다소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보다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한 불안, 두려움, 죽음에의 공포가 나를 한순간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른 감정들. 대포로 인해 얼어붙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감정인 공포말고는 표현되어지지 못하는 감정들. 표현되어서는 곤란한,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들의 공포 또한 얼어붙은 상태 이후에 그와 똑같은 밀도와 중량으로 나를 짓눌렀다. 어쩌면 전쟁과 죽음에의 공포보다는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사라져버릴 감정들에 대한 공포가 더 컸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아름다움 같은 것. 모든 창조적이고 다양한 행위들. 몽상가의 몽상과 독학자의 독학에의 열망, 음악가의 음악, 화가의 그림, 조각가의 조각, 소설가의 소설. 예술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위협 앞에 얼어붙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결빙이 가져다주는 모든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의 말살! 인간의 심장에 겨누어진 총구의 공포 앞에서 어느 누가 창조와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죽음에의 공포 앞에 하얗게 질리고, 오로지 살기 위한 생각밖에는 없으며, 살기 위한 생각 그것 하나로 인해 다른 생각들은 모조리 스스로 말살시키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결국 남는 것은 나날이 커져갈 것이 분명한 증오심과 복수심 뿐이다. 전쟁이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전쟁이 어디서든 일어나지 말아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나 더 피폐해져야 알게 될까? 얼마나 많은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려봐야 알게 될까 우리 인간은. 더이상 몽상하지 못하는 세계에서의 몽상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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