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봄이 오는 길목에서

시월의숲 2011. 3. 3. 23:21

1.

봄은 이미 와 있지만, 그 모습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봄옷을 꺼내려는 찰나 선득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다시 겨울옷을 꺼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봄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지금은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을 뿐. 봄은 매복의 달인이다. 그러니까 그 순간. 봄이 향기롭고 따스하게 피어나는 순간, 고통과 환희로 뒤범벅된 그 순간이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오래가기를 바랄뿐. 그러니까 그만 웅크려있고 어서 나오시길. 머리카락이 보이니까.

 

 

2.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길에 건너야 할 신호등이 두 개가 있다.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에 네 번 신호등을 지나친다. 운이 좋으면 건널목 앞에 도착하자마자 파란불이 켜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싫든 좋든 신호등을 바라보며 얼마간 서 있어야 한다. 분명 내가 신호등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똑같지만, 어떨 때는 무척이나 길게, 어떨 때는 무척이나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옆에는 나와 같이 도로를 건너갈 사람들이 서 있고, 반대편에는 나와 반대로 건너가야 할 사람들이 서 있다. 사람들은 신호등 앞에 서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져서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역시나 알 길이 없다. 나처럼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며 서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서 신호등의 불이 빨간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나름의 고민과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등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질 때 그 궁금증은 더 커진다.

 

 

3.

내가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시간을 모은다면 얼만큼이 될까? 나는 앞으로 이 길을 얼마나 더 건너가야 할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문득 부질없는 상념에 젖는다. 쉼없이 걸어가다가 어쩔 수 없이 멈춰서야 하는 시간을 나는 무슨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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