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죽음이라는 기정사실

시월의숲 2011. 3. 10. 22:51

어렸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크면서 깨닫는 것 중에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생명으로 가득찬 어린 나이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느끼며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과 가까웠던 누군가가 죽고, 그래서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서서히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감지하게 된다.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던 죽음이라는 현상이 점차 현실적으로 다가옴을 느낄 때는 물론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거나, 자기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험'이라는 것. 죽음을 담보로 하는, 오로지 인간들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 우리의 인생은 짧고, 그동안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불확정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그것을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보험이라는 것이다. 지금껏 아무런 생각없이 살고 있던 나에게 문득 주위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하루라도 일찍 보험에 들어야 나중에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나는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정작 보험에 들려고 하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거부감에 묘한 슬픔을 느낀다. 그래, 우리는 모두 한시적인 존재들이고, 그저 찰나의 순간을 살다갈 뿐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면서도, 존재의 사라짐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상실감과 표현할 길 없는 슬픔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 죽음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보험'은 그 중 하나의 현상일 뿐.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모든 일들은 항상 죽음이라는 기정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독일의 소설가 야콥 하인이 쓴 글에서 그의 엄마는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이라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현실은 여전히 차갑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좀 더 편안하게 죽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항상 몇 걸음 느리며 언제나 서툴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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