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너의 일, 나의 일, 우리의 일

시월의숲 2012. 4. 20. 22:01

살면서 자살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한창 예민한 감성과 자신만의 세상으로 무장한 청소년기에는 더욱. 누군가 쳐다만 보아도 자지러질듯 웃다가,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죽음이란 어쩌면 강렬한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업에 대한 압박,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친구관계에 관한 말못할 고민으로 가득찬 중학생이라면 말이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중학생이란 삶에 대한 에너지로 가득차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에 그리 단호히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너무 연약하거나 너무 강하다.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그 연약함이 강해지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 이런 쓸데없는 말들은 다 집어치우자. 중학생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자살충동으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연이은 중학생의 자살 소식에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세상을 탓하고, 누군가는 가정환경을 탓하고, 누군가는 시스템을 탓했다. 나는 그 어떤 말에도 슬픔과 거기 담긴 진실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 고층아파트에서 미련없이 뛰어내릴수 밖에 없었던 힘, 거역할 수 없었던 그 힘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 적었던, 유서가 되어버린 글들. 어떤 심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갔는지, 비로소 고개를 들었을 때 어떤 풍경이 그들의 눈에 와 박혔는지, 마지막으로 누굴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때의 공기와 온도, 햇살은 어떠했는지. 나는 자꾸만 그런 것들을 상상하게 된다. 자살 직전 그 아이의 심정과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이해해, 아니 상상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아무 소용 없는 일일지라도.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자. 자살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꿈꾼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건 다른 문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중학생은 몸소 그것을 실현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 자살을 꿈꾸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지금쯤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자살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임이 분명하니까. 나는 다만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를 응시해 볼 뿐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리고, 불합리한 시스템 때문이라고 습관적으로 외치며, 책임질 누군가를 먼저 찾기 전에 우선은 한 아이의 내면을 상상해보는 것(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이 먼저 아니겠느냐고. 우선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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