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

시월의숲 2012. 12. 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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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할 말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자체가 점차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건 가뭄에 갈라지는 논처럼 건조하다 못해 아픈 일이다. 남아 있는 습기를 모조리 얼려버리는 겨울이라는 계절탓일까? 며칠 전 우연히 사무실에 걸려있는 디지털 습도계를 보았는데 -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나는 기계가 고장난 것이 아닌가 하고 동료에게 물었는데, 그건 습기가 거의 없다는, 즉 0 퍼센트라는 뜻이라고 동료는 말했다. 그러니까 공기중에 습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 나는 순간 습가 하나도 없을수도 있구나 하는 이상하고도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들었다. 그렇게 이상하고도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요즘엔 자주 경험한다. 그런 것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물에 무심해지는 건지, 민감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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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사라진다는 건 사실 지금 내 상황을 나타내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건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는데 사라진다는 것과 할 말이 아예 없다는 건 전혀 다른 뜻이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고쳐 말해야 한다. 할 말이 없다, 고. 이 글은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 같기도 하고 말장난 같기도 하다. 그래그래, 말장난은 하지 않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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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이 많이 쏟아졌다. 여자 중학생들은 특유의 높고 들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눈밭을 뛰어 다녔다. 그들에게는 학교 건물의 현관과 계단, 교실이 자신들이 밖에서 가져온 눈으로 더렵혀지는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 것이다. 오직 순수하게 눈이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들이 오늘은 내심 부러웠다. 하얀 눈처럼 눈부시게 위협적인 아이들. 중학생의 나이란 그런 것일까. 내 중학생 시절이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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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들러서 훔쳐보곤 하는 시인의 블로그에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었다. 자신이 낸 책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포장마차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온 이야기로 시작을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가 어떤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가 올려놓은 글을 읽으니 나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번쯤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악기 연주를 들으면 나도 저렇듯 아름답게 연주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내가 직접 부르는 노래나 연주가 결국은 내가 생각한처럼 그렇게 쉽게 나를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래나 연주를 듣는 것에서 느낀 감동은 그것을 부르고 직접 연주하는 것으로 전이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전이는 처음 내가 느꼈던 감동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동을 받는 것에서 벗어나 감동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내가 느낀 것을 누군가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 감동의 매커니즘은 어쩌면 이기심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런 나를 좀 바라봐줘요' 라는 마음은 타인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고 할 때 이기심보다는 인간의 외로움이나 고독에 더 근접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좀 바라바줘요'가 결국은 '너도 나와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로 발전할 때 인간은 사랑에 빠지는 것일 테니까. 그건 결국 서로의 고독을 알아 보았다는 뜻이므로. 그러니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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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인지도 모르니까. 나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 누군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니까. 나도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누군가 들어주지 않아도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사람, 악기 다루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보아주는 타인의 존재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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