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럴 수 밖에 없었네

시월의숲 2012. 12. 28. 20:19

정말 거의 하루종일 눈이 내린다. 오후에 조금 그치는가 싶더니 언제부터인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눈발이 굵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랫동안 내리는 것 같다. 눈 오는 날이 그렇듯 그리 춥지는 않다. 연말이라서 오늘 하루는 좀 정신없이 바빴고, 저녁엔 회식자리에 참석했다. 발령이 나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의 인사가 있었고, 여느 회식보다 '위하여'를 자주 외쳤다. 일 년의 삶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면 으레 마음 속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속절없음 앞에 우리는 늘 무방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찌 할 것인가? 술 한 잔으로 털어버리거나, 한바탕 웃음으로 씻어내는 수 밖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늘 만나기로 했던 고모와 동생은 오지 못했다. 고모가 있는 춘천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곳에 오려면 어쩔 수 없이 난감한 눈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했는데, 많이 아쉬웠다. 조카들의 얼굴도 아른거린다. 지유는 삼촌, 삼촌 하면서 제법 말을 잘 하던데. 아직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지만, 전화를 통해서 듣는 지유의 말은 들을 때마다 발음이나, 문장수준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서준이는 또 얼마나 컸을지.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만날 수 밖에. 아쉬움이 크면 다음 번에 만날 때 기쁨도 클 것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올때는 집 창가에 앉아 가만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의자 옆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여 있으면 금상첨화겠지.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눈 내리는 풍경은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흑백의 무성영화. 화면 한 가득 오로지 하얀 눈과 눈 이외의 것들은 그저 까맣게 존재하는. 혹여 눈 속을 걷게 된다면 무성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겠지. 지옥같은 도로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눈을 치워야 하는 의무만 없다면, 그저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 따뜻한 방과, 이불, 커다란 창문과 내리는 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따뜻한 오미자차가 있는데 더 뭘 바라겠는가? 오늘 같은 날이면 어쩔 수 없이 드는 속절없음마저 감싸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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