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장미가 피기 시작한다고

시월의숲 2013. 5. 17. 22:20

오월도 반이 넘게 지나갔다. 나의 장기는 모든 지나간 것들을 반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시간과의 싸움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지고마는 싸움. 이길 수 없는 싸움. 해독되지 않는 시를 읽을 때처럼, 시간은 늘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나를 이끈다. 그 막막함. 그래서 나는 늘 무언가 지나갔다고, 과거형으로밖에 말하지 못한다. 지나가고 난 뒤에 남는 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 끊임없이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숙명인 것일까? 오월을 지나고 있고, 목련과 벚꽃을 지나 자주빛 모란이 뚝뚝 떨어지고, 이제 장미가 피기 시작한다고. 예년과 달리 더운 날씨에 어리둥절하고 있다고. 그래도 밤엔 아직 창문을 열지 못한다.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고, 나는 예정대로 축가를 불렀다. 다행히 우황청심환은 효과가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문예대전에 수필을 보내고 나서 보기좋게 떨어졌고, 며칠 전에는 나를 낳아준 사람의 제사가 있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한 번 죽은 사람은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진부한 이야기들은 듣기 싫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상상이란 고작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이다. 요즘 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가. 만화를 볼수록 현실을 더욱 실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현실을 잊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슬픈 존재라는 사실을. 이토록 진부한 진실이라니. 오월의 햇빛은 찬란한데,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팔  (0) 2013.06.06
그들의 향기에 흠뻑 취할 때  (0) 2013.05.23
오월에는 사랑의 서약을  (0) 2013.05.02
이거 좀 드시겠어요?  (0) 2013.04.12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0) 201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