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필로소픽, 2014.

시월의숲 2014. 6. 13. 20:20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된 베른하르트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특별한 우정을 다루고 있다. 파울은 저 유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이자 유명한 정신질환자였다. 작가는 저 둘의 관계를 깊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둘 다 집안의 파렴치한 인물로 낙인 찍힌 존재들이었으며, 루트비히는 자신의 철학으로, 파울은 자신의 광기로 유명해졌다서술하고 있다. 루트비히는 단지 자신의 광기를 책으로 출판했을 뿐이며, 파울은 그렇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 소설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그의 조카에 대한 저자의 긴 독백이므로, 그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트비히가 없었다면, 그가 그의 저명한 철학책을 출판하여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그의 조카였던 파울이 지금처럼 독특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소설을 읽다 보면 삼촌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자를 느낄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이므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파울과의 일화와 문명과 예술, 광기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을뿐이다. 나는 문단의 구분이 없는 이 길고도 냉소적이며 증오에 찬 독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처음 읽자마자 스며들듯 소설에 빠져들어 갔다. 어떤 주제든 그들은 심도 높고 진지한 대화를 해나갔는데, 특히 파울은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무엇보다도 광적인 열기에 휩싸여 예리한 분석과 비판을 했다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 때문에 수많은 나라를 여행할 정도였다고 하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작가도 안타까워하듯이 나 또한 파울이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과 독창적 심미안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으로 자신만의 책을 써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그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도 자신에게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정신의 파도를 글로 써내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던지, 몇 페이지를 실제로 쓰기도 했고,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장소로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쓰려고 했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기도 전에 벌써 사라져버리거나, 글로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다른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와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들을 도저히 적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머리에서는 그들이 (그들 머릿속의)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잔인한 속도로 그치지 않고, 그리고 실제로 쉽 없이 정신적 능력이 생산되고 있으므로 어느 날 그들의 머리는 터져 버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들은 죽게 된다(35쪽)'고 베른하르트는 표현했다. 순식간에 증폭되는 사고력을 그 자신이 감당해내지 못하고 어느 순간 터져 버리고 만다고. 그렇지 않다면 파울이 책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책을 쓰고 못쓰고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 미쳐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러했으며, 평생을 광기와 함께 살았으므로, 그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광기요, 광기가 곧 그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천재와 광인은 얼마나 다른가? 혹은 얼마나 같은가? 파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만 같다. 그의 발작이 아직은 심하지 않을 무렵(아직 머릿속이 터지지 않을 무렵), 파울과 했던 많은 대화들 속에 담긴 그의 명석하고 비범한 식견은 그를 단지 미치광이로만 부르기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천재라는 말 속에 담긴 비범함에서 우리는 광기의 그림자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저자는 그를 천재 혹은 미치광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판단하지 않는다. 또한 어설프게 그의 광기를 분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그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는 천재일지도 모르고, 한낱 미치광이에 불과할지도 모르며, 그 둘 다거나 혹은 둘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와 했던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순수하고 열광에 찬 그의 비범한 사고에 작가 자신이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들을 십 이년 동안 하나로 묶어주는 우정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파울이 '이미 오래전에 세상과 결별했으나 여전히 세상을 떠돌도록 강요받은 인간'처럼, '이미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상 속에 있어야만 하는 인간'처럼 보였을 때, 그러니까 '가련한 죽음의 냄새'만을 풍길 뿐일 때(머릿속이 결국 터져버리기 직전에) 그를 외면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책망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나,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자책한다. 이 책의 역자인 배수아는 이를 두고 '친구에게 바치는 베른하르트 나름의, 참으로 베른하르트다운 레퀴엠'이라고 썼다. 파울이 언젠가 그에게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 주었으면 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합해서 여덟 명 혹은 아홉 명이 전부였으며, 자신은 그때 크레타에 머물면서 희곡을 쓰고 있었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무덤에서 하지 못한, 12년 동안 이어온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에 대한 베른하르트 나름의 긴 '연설'일 것이다. 파울이 바란 대로 비록 무덤에서 한 연설은 아니지만, 무덤에서 하는 일시적인 연설보다 더 기념비적인 연설, 오랜 시간 혹은 영원히 기억될만한 긴 애도의 '연설' 말이다. 나는 이 소설로 베른하르트를 처음 만났는데, 그가 파울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인상을 나는 이 소설에서 받았다. 물론 내가 느꼈던 인상은, 그들이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일종의 행복감 혹은 유대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렵고, 알 길은 더더욱 없는 매혹이며, 기이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었으니까. 광기와 질병, 죽음과 예술이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엮이면서 상당히 독특한 아름다움과 여운을 발산한다. 그것은 필립 글라스의 음악처럼 혹은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의 단조롭지만 미묘한 차이처럼, 의식의 흐름같이 끊어질듯 이어지며 확산되는 그의 문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 작품이 베른하르트의 소설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인간적이며 유머러스한 작품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이 이 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서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베른하르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 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베른하르트의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 할테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괴롭지 않고 오히려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