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3. 3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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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아픈 것을 보니 봄이 오긴 올 모양이다. 삼월인 걸 귀신같이 아는구나.(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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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야지 생각하면 희한하게 그날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늘 한 발 늦는다. 가족들은 무심한 나를 탓하지만 나는 좀 억울하다. 정말 전화하려고 했었는데!(20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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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바닷가의 도시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졌으나 그 사실이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치유하지 못한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치유하지 못한다.' 나는 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지금껏 내 안의 무언가가 심각히 뒤틀린 채로 혹은 손상된 채로 살아왔을 테지만, 외부적인 그 어떤 것도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저 문장은 다름 아닌 '나'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20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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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같지 않니? 그가 말했다. 나는 ‘어차피’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감정의 결들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리하여 그것이 얼마나 폭압적이 될 수 있는지를. 그것은 때로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하리라.(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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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밤 산책.

이젠 춥다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덥다는 말 또한 어색한. 이래저래 어색한 시간의 어떤 통로를 지나고 있다.(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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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해서 집에 오는데, 도로 위에 흰 글씨로 '추억'라고 쓰여 있길래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주의'였다. 단순히 눈이 나쁜 것인지, 그렇게 읽고 싶었던 것인지.(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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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진은영, 「가족」 전문(『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

 

왜 유독 아버지에게만 가혹해지는 모를 일이다. 가족이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오늘도 참지 못하고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내뱉고는 이내 후회를 했다. 내 마음속 '꽃들이, 화분이 다 죽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이상하고 가슴 아픈 일.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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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하든지 좀 과하다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하게 되는 말이 있다. '뭘 또 그렇게까지!' 하지만 그들은 그런 나를 보면 일단 한숨부터 쉰 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아직도 네가 그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으니 어떡하겠니.(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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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인데 밖이 왜 이리 환해? 문득 창밖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202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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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어쩔 수 없이 혼자일 수밖에 없어지는 것과 별개로,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사람들과의 만남이 힘들어진다.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내가 하던 수천번의 다짐과 각오가 수만 번, 수십만 번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자발적 고립과 자발적 은둔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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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기 때문일까. 왜 모든 것들이 하기 싫어지는지 모르겠다. 하고자 하는 의욕은 털끝만큼도 없고,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한다. 그냥 따뜻한 햇살 아래서 잠이나 푹 자고 싶다.(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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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한수진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폴란드 국립 발레단의 '지젤'을 보며, Drew Sarich가 부른 뮤지컬 인어공주의 Poor Unfortunate Souls를 듣는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금요일 밤에, 혼자서, 맥주와 함께.(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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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것이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하찮은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 파스칼, <팡세> 중에서

 

하찮은 것이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우리 역시 하찮은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며,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또한 슬퍼지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슬픈 위로라는 것은.(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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