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는 푸른 죽음을 우네

시월의숲 2023. 10. 28. 21:53

조지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 <자살>

 

그냥 집에서 쉴까 생각했다. 하지만 창으로 비춰드는 햇살이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저 햇살을 맞으며 걷고 싶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시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 중에 저 시월의 햇살과 공기도 있을 테니.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제는 어디로 갈까 정해야 했다. 가까운 민속마을이라도 갈까 아니면 가끔씩 가곤 하는 절에 갈까. 짧은 고민 끝에 그냥 집 근처에 있는 저수지 주위를 걷기로 했다. 3킬로미터 조금 넘는 저수지의 둘레길을 걸으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 천천히 걸으면서 아쉬운 이 가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자, 생각하면서.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파란 하늘은 정말 눈부시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었다. 저 하늘을 조금만 보고 있어도 내 눈이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저수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낙엽이 본격적으로 지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도 들렸으며, 가끔 주위를 환기시키듯 오리들이 저수지 위로 날아와 앉았다. 누런 들판은 이미 추수를 마친 곳도 있었고 아직 벼를 베지 않은 곳도 있었다. 햇살은 아직까지도 따스함을 잃지 않았고 그늘에 들어서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급할 것이 없었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심호흡을 길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둘레길의 한 삼 분의 이쯤 왔을 때 정자와 벤치가 있는 곳이 나왔다. 거기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물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트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살 수도 없었다. 일단 앉아서 쉬자, 생각했다. 앉으니 메고 온 작은 가방 속 책이 생각났다. 꼭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으나, 일단 걸으러 나간다는 생각과 나가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함께 하자 책을 챙겨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볍게 걷기 위해서, 그러니까 걷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싶었다면 책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책과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걷기만 하자는 생각에서, 앉아서 책을 읽고 가자는 생각으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갔다. 

 

오늘 가져온 책은, 엘제 라스커 쉴러의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시집이었다. 배수아가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조지 그로스>라는 시가 눈에 들어왔다. 조지 그로스는 독일의 화가라는 설명이 책 하단에 짧게 부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강물 속에 있었던가

그의 인물들은 가득 부풀어 오른다

 

 

어느 시든 마찬가지지만 시를 한 번만 읽을 수는 없다. 그게 시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하늘과 저수지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조지 그로스>라는 시를 읽는다.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그늘진 달이 비추는 대양

그의 신은 죽은 척하고 있을 뿐

 

 

나는 그 자리에서 이 시를 읽고 조지 그로스라는 화가가 몹시 궁금해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명의 이기(핸드폰)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백과사전에 그의 대략적인 이력과 작품세계 그리고 <자살>이라는 그림이 나왔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세계대전, 무의미 등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웅성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는데 '추락주의'라고 쓰인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지판은 내 오른쪽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서, 마치 나를 바라보듯 붙어 있었다.

 

엘제 라스커 쉴러의 시와 그의 시집 속 조지 그로스(혹은 게오르게 그로스)와 '추락주의'와는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추락주의'라 쓰인 표지판을 한참 바라보았다. '추락이란 참으로 달콤하지 아니한가!' 이런 문장이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고 해야 하리라. 갑작스러운 그 생각은 추락 옆에 붙은 '주의'라는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주의'라는 말로 인해 '추락'은 더욱 비밀스럽고도 은밀하며, 유혹적인 무언가로 탈바꿈된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듯, 한번 떨어지기 시작한 낙엽은 막을 길이 없고,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늘 치명적이다. 치명적인 어떤 것을 품고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그것을 모르거나, 모르고 싶을 뿐. 

 

 

 

*제목 '나는 푸른 죽음을 우네'는 엘라 라스커 쉴러의 <나의 푸른 피아노>의 한 구절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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