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에곤 쉴레를 좋아하세요?

시월의숲 2024. 4. 28. 19:51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안부를 묻는 대신 에곤 쉴레의 그림을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에곤 쉴레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프로필 사진 에곤 쉴레 아니에요?"라고 말했고, 그제야 나는 그가 잘 보고 있다는 것이 내 SNS의 프로필 사진이라는 걸 알았다. "맞아요, 에곤 쉴레..."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우리들은 각자의 일 때문에 금방 헤어졌다. 애초에 우연히 만난 것이었기에 더 길게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다시 한번 더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1박 2일 워크숍에서였다. 내가 인사를 하자마자 그는 또 "어떻게 에곤 쉴레를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네요."라고 물었다. 전에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에곤 쉴레에 대해서 묻는 그가 의아하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바꾼 것인데, 질문을 받고 보니 내가 왜 그 그림을 프로필로 사용하려고 했는지 궁금해지네요. 글쎄요... 제 얼굴 사진을 올릴 용기가 없으니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라도 올리고 싶다는 뭐 그런...?"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말들이었으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올린 그림이었기에 심오한 뜻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리지 않죠. 수많은 사진과 그림 중에 하필이면 에곤 쉴레의 그림을 올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그림을 아무리 느껴보려 해도 느낄 수가 없어요. 언젠가 제가 후배의 집에 갔을 때 스크린으로 명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거든요. 실제로 본 것도 아닌데 붓의 터치나 색감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느껴졌어요. 하지만 에곤 쉴레의 그림들은 정말이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 그림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수많은 화가들 중에 하필이면 에곤 쉴레의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은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을 느꼈으면 이 그림을 선택할 수가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나는 그의 열변에 적잖이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했는데, 실제로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에곤 쉴레의 그림은 어떤 그림들보다 확실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비틀린 몸과 벗겨진듯한 피부의 색깔, 기괴하고도 과감한 포즈 등에서 절망이나 고통을 느낄 수 있죠. 제 생각에 에곤 쉴레의 그림들 속 인물들은 고통과 절망만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취한 듯 에로틱하고 과시적이라는데 있는 거 같아요. 아, 이건 물론 제 생각입니다. 제가 느낀 것들이죠. 이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당신도 에곤 쉴레의 그림들을 보면 느껴지는 게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그림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겠죠. 소위 명화라고, 유명하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반드시 느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미술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자리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은 에곤 쉴레의 그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후로 그와는 더 이상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가 정말 에곤 쉴레의 그림들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네와는 전혀 다른 그림 스타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인지, 그래서 자신의 협소한 이해의 폭을 좀 넓혀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과는 다른 확실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난다면 그땐 지루한 인사 대신 이렇게 물어보리라는 것을.

 

"당신의 에곤 쉴레는 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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