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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 모든 게 다 한심하게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를 둘러싼 것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조차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나는 뭐가 그리 신나서 떠들어댔던 것일까?(20230118) * 아직은,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겠니. 지금은 적응하느라 힘들 때이니, 이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몹시 그리울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면 그런 그리움은 점차 옅어지겠지. 옅어지고 옅어져 결국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 다 그런 게 아니겠니.(20230119) *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그렇고, 나 자신도 내가 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코 친절한 게 아니었다. 진정한 친절함이란 마음속에 어떤 기대나 바람, 증오나 짜증 같은 것들이 섞여 있지 않아야 할터인데, 나는 오늘 속으로는 화..

입속의검은잎 2023.02.05

우리는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중세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봉투에 성당과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중에서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바르셀로나까지 무려 열여섯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탔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밤이었고, 우리들은 곧장 호텔로 가서 잠을 잤다. 스페인에서의 제일 처음 일정은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 대성당을 보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필라르 성당이 있는 사라고사..

토성의고리 2023.02.01

오래전 기억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내가 살던 곳. 마당 한편에 따로 세워져 있던 재래식 화장실. 환한 대낮에도 노란 백열등을 켜야 했던 그곳. 종종 화장실에 빠지는 악몽을 꾸곤 했던. 코를 틀어막고 바닥을 조심하며 화장실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눈앞에 보이던 낡은 나무문. 나무를 거칠게 잘라 만든 작은 문에는 진한 색깔의 옹이들이 여러 개 박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뭉크의 '절규' 같았던. 어렸던 나는 뭉크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것은 그저 사람이 아닌 귀신의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그 화장실에서 절규를 알지 못한 채 절규했으니, 그것이 내 공포의 근원이었을까.

어느푸른저녁 2023.01.28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참 이상하지. 퇴근길에 셀프 주유소에 들렀다. 주유기를 차에 꽂고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뒤 맥락도 없이 갑작스레 떠오른 그 생각에 나는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는데, 쓸데없이 감상적인 생각도 생각이지만, 왜 하필 '나'가 아니라 '우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을까? 주유를 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닐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푸른저녁 2023.01.19

단상들

* 12~3년 정도 된 거 같다. 당시 공항 면세점에서 산 지갑을 지금까지 쓰다가 이젠 좀 낡았다 싶어서 작년 말 여행을 가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똑같은 브랜드(디자인은 좀 다른)의 지갑을 샀다. 어째,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브랜드의 지갑을 '공항'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사게 될 줄이야. 하지만 사놓고도 아직 원래 있던 지갑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나는 오늘까지도 아무런 인지를 못하고 있다가 문득 책상 서랍에 케이스 채 고이 들어있는 지갑을 보고 나서야, 아, 내가 지갑을 샀었지, 하고 깨달았다. 굳이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뭐, 언젠가는 쓰게 되겠지만. (20230112) * 어쩌면 이건 나만의 통과의례가 아닐까 싶다. 새해만 되면 어김없이 어딘가 탈이 나는 것을 보면. 어제는 ..

입속의검은잎 2023.01.18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주말 내내 《더 글로리》를 정주행 했다. 학교폭력의 묘사가 너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과시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실제 현실은 그보다 더하다는 기사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그보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즌2에서 본격적인 복수가 시작될 모양이다. 시즌1은 복수를 위한 사전준비 정도로 보인다. 어떤 식의 복수가 될지 지켜봐야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가해자는 역시 자신이 가해자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고도 그걸 즐기는 것이거나. 극 중 동은(송혜교)의 독백 중 이런 것이 있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파상은 파상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당한 만큼 갚아주지 않고, 당한 것보다 더 갚아주겠다는 의지..

봄날은간다 2023.01.15

여행의 위험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그렇다면 여행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와 제대로 된 준비라는 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 여행이란 때론(어쩌면 많은 부분) 즉흥적이지 않은가? 여행을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저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속으로 계속 이런저런 의문을 늘어놓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일터인데 왜 그리 따지고 드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그런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되지..

토성의고리 202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