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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잠

어제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제법 유명한 산을 넘어왔는데, 단풍이 절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이외에도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해 도로는 정체되었는데, 그 도로 위에서 나는 갑작스레 멀미가 날 뻔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잠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잠을 자야 한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잠들고 싶었으나(나는 멀미가 나면 자는 습관이 있다), 운전 중이었으므로 당연히 잠들 수 없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멀미와 또한 갑작스러운 잠의 습격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잠, 잠을 자야 한다. 그 생각만으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자는 모습이 얼마나 처절해 보이는지 아니?" 나는 당연히 내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그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되질 ..

어느푸른저녁 2022.11.06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에 대해서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 진은영, '시인의 말' 중에서(『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수록) * 시집의 맨 처음 실려 있는 시인의 말에 눈길이 머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에 대해서. 나는 늘 내 외로움밖에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달래기 위해 애를 썼을 뿐, 내가 아닌 누군가를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그 차가운 인식이. 나는 언제나 희생을 강요당했고, 그래서 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해야만 했으며, 그래서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고, 가장 힘들며, 가장 외..

어느푸른저녁 2022.11.04

강아지를 대하는 두 가지 자세

우리들은 그때 사무실 근처에 사는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어미와 함께 우리 사무실 앞 잔디밭에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새 새끼를 또 낳았다니! 우리들은 개가 이렇게 빨리 새끼를 낳을 수 있는지 신기해했고, 이번에 낳은 새끼들이 총 일곱 마리라는 사실에 더욱 신기해했다. 어미개의 체구는 작았는데, 어찌 저렇게 작은 몸에서 일곱 마리의 새끼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들은 새삼 경이로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종종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와 조심스레 강아지들을 보러 갔다. 처음에 강아지들은 개집 안에만 있어서 보이지 않고, 어미개의 지친 모습만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씩 집 밖에 나와 꼬물거리며 걸어 ..

어느푸른저녁 2022.10.31

시월의 시

두개골과 상처, 거기에 부딪쳐 서른다섯 개의 종이 노래한다. 그리고 내일은 눈먼 우리에 갇혀 울고, 공포도 외따로 앉아 광란하리라. 망치 불에 사슬이 끊기기까지는 사랑이 어둠을 터놓기까지는, - 딜런 토머스, 「생일에 부치는 시」 중에서 * 내게 '시월의 시'가 있었네. 우연히 책장을 보다가 무심히 꽂혀 있는 이 시집을 발견했다. 아마도 본가에 갔다가 가져온 것 같은데,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내 가족 중 누군가 샀을 리도 없으니, 이 시집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집에 오게 된 것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시집을, 고대의 비밀 서적을 다루듯 조심스레 들여다본다. 대체로 장시로 이루어진 시집을 좀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겠지만, '시월의 시'라는 제목만으로..

어느푸른저녁 2022.10.28

여기보다 더 멋진 곳으로 저녁 외출을 하듯

그녀는 자기 아버지처럼 갑자기, 그해 가을에 죽었다. 음악회에서 좋아하는 악장이 연주될 때 떠나듯, 불이 켜지기 한 시간 전에 나오듯 그렇게 갔다. 아니면,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을을 사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아프리카의 해변처럼 뜨거운 정오의 태양을, 끝없이 퍼지는 맑은 가을밤의 냉기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웃으며 재빨리 빠져나가듯, 시골에 가듯, 다른 방으로 가듯, 여기보다 더 멋진 곳으로 저녁 외출을 하듯 그렇게 갔다.(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중에서) * 가을이 되어서일까? 요즘 부쩍 내가 알거나, 알 수도 있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부고가 많이 들려온다. 부고 문자를 보고 있으니, 얼마 전에 완독한(드디어!)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 속 저 문장이 생각났다...

어느푸른저녁 2022.10.23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음산책, 2013.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51쪽) *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67쪽) * 그들의 삶은 함께 꾸려졌고, 함께 짜였다. 그들은 마치 배우들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 오래된, 불멸의 연극 대본 이상의 세상은 없는 배우들.(78쪽) * 아이들은 우리의 작물이고, 밭이고, 땅이다. 어둠 속에 풀려난 새들이다. 새로이 회복된 실수다. 그래도 아이들은 우리보다 삶을 조금 더 잘 알고 조금 더 성공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붕어빵의 맛

붕어빵을 먹었다(정확히는 잉어빵이라고 쓰여 있었다. 크기가 다른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크기도 모양도 붕어빵과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붕어빵이라고 쓴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결코 줄을 서면서까지 사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네에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밤이었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붕어빵 아저씨는 아직 손이 익숙하지 않은지 우왕좌왕하면서 연신 입으로는 팥 두 개, 슈크림 두 개, 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밀려드는 주문을 외우지 못해 노트에다 메모까지 해가면서. 앞에 서 있는 나에게도 몇 번이고, 팥 네 개, 슈크림 두 개 맞죠?라고 물어서, 나 역시 몇 번이고 팥 네 개, 슈크림 두 개 맞아요,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장사..

어느푸른저녁 2022.10.22

보이지 않지만 보이고,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것

너는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과 이야기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니? 저는 보이고 들리는 것들과의 대화가 더 어렵던걸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건, 모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었어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죠.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그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답니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들리지 않는 게 들리지 않는 게 아니에요. 넌 참 이상한 아이로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상하다는 건 또 뭘까요? 무엇이 이상한 걸까요? 혹시 저를 포함한 이 세상이 이상한 건 아닐까요? 도무지 이..

어느푸른저녁 2022.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