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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최열, 『권진규』, 마로니에북스, 2011.)

권진규가 아로새긴 숱한 인간흉상들은 모두 다르지만 같다. 남성과 여성을 분간할 수 없고, 속인과 승려를 가를 수 없으며, 환희와 비참도 나눌 수 없는 인간이다. 현실을 지워버린 채 꿈으로 가득 채운 그릇일 뿐, 거기엔 눈물도 피도 메마른 듯 그대로 잠들어버린 영혼의 선율만 흐른다. - 최열, 『권진규』 중에서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저 책표지로 쓰인 흉상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저 책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사서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결국 그것을 읽었다. 나는 그의 전시회를 가본 적이 없고,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의 작품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특히 사람 흉상의 테라코타-에 이끌렸다. 그 이끌림에 대해서 당..

흔해빠진독서 2023.01.09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하다고

내 여행은, 작가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내가 있는 장소의 이동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 하다고. - 배수아,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중에서 *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나는 꿈과 현실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기운과 시차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스페인에 도착해서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수시로 깨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적응하는 것인지 저항하는 것인지 모를 몸과 마음으로 낯선 이국에서 십여 일을 지냈다. 다녀오니 한 해의 마지막이었고 곧 새해가 시작되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토성의고리 2023.01.07

어떤 새해맞이

* 잠은 자도 자도 끝이 없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비행기에서 14시간 정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도, 인천공항에서 집까지 계속 졸았다. 그리고 지금 또 자야 한다. 물론 잘 수 있다. 잠이 온다. 열흘 정도 집을 비우고 돌아오니 보일러가 고장 나 있다. 그래도 자야겠지. 일단은. 참, 오늘은 2022년 12월 30일이다. * 토요일에 전화를 걸어서 보일러 수리 예약을 했다. 주말이라서 월요일이나 되어야 올 수 있다고 기사는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 사이 2022년이 가고 2023년이 왔다. 1월 2일 월요일이 되었지만, 온다던 보일러 수리 기사님은 오지 않았다. 새해에 나는 새 업무를 맡게 되었고,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여행의 여파도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 문득 생각이 나 전화를 ..

어느푸른저녁 2023.01.06

오로지 책을 읽는 행위만이 전부인 것처럼

그날 밤 티엔은 편지를 썼다. 받을 사람 없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 것들을 적었다. - 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에서(『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수록) * '우리는 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며,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오래전에 나는 위와 같은 글을 썼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어느푸른저녁 2023.01.01

작지만 확실한 위로(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독후감을 쓴 날짜를 들여다본다. 8월 30일.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핑계는 늘 일이다.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집에 오면 책 읽을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잠 자기 바빠서, 피곤해서 등등. 정신없이 바쁘면, 일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열망 또한 커지곤 했는데, 그래서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서 책을 읽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열망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쓴 약을 삼키듯 하나씩 읽어나가는 단편들은, 읽고 난 후 잠깐 동안만 내게 머물다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겨우, 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이 읽히..

흔해빠진독서 2022.12.17

단상들

* 퇴근길에 문득 어둡고 환한 도로를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니,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래서 매번 같은 곳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놀이를 했었던 그때 그 시간들이.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최소한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건 불행일까 다행일까.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단념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고, 기대가 있다면 다만 무참히 꺾일 뿐이라는 걸.(2022.12.02) * 올해 첫눈은 서울에서 보았다. 문득 만나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첫눈을 '만나는 것'과 첫눈을 '보는 것'. '만나다'와 '보다'의 간격에 대..

입속의검은잎 2022.12.11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문학동네, 2021.

그래, 듣기만 해도······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이란 과연 뭘까?(18쪽, 「여름방학」 중에서) * "나는, 음,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리고 차에서 펜을 꺼내와 '내 자리'라고 쓰인 낙서 옆에 새 낙서를 했다. '그래, 니 자리.' 그러고 나자 그냥 어른이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실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55쪽, 「여섯 번의 깁스」 중에서) * 장례식 도중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자 딸이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거기에서 읽었다. 자신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죽고 싶지 않을까? 그래도 살아난 것에 감사하게 될까? 그 이야기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 한 장면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

나는 오래전에 저 장면이 표지 사진으로 사용된 소설을 읽었다. 그 책 속의 사진은 붉은기가 도는 갈색빛으로, 마치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하지만 컬러로 된 저 사진만 보고도 나는 곧 그 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은 『대심문관의 비망록』이고, 저자는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이며, 역자는 배수아다. 나는 그 책을 읽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아님 책 표지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배수아가 번역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그 책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우연히 저 사진을 보았을 때 ― 사진이 아니라 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 한 장면이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으므로 내게는 그저 사진일 뿐인 저 장면을 보고 ―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 하나를 떠올린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어느푸른저녁 2022.12.06